수갑 찬 신(神)은 응급실에 없다 / 의사에게 돌을 던져라
그때는 역삼동에 ‘김미파이브’라는 곳이 있었다. 뜨거운 조명 아래 땀 냄새와 환호성이 뒤섞인, 날것 그대로의 링이었다. 나는 악역 프로레슬러였다. 마이크를 잡고 상대를 도발하는 ‘마이크 웍’은 쇼의 백미였다. 나는 거칠게 소리쳤다. "밖에 있는 앰뷸런스 보여? 네가 타고 갈 거야." 관중들은 열광했다. 하지만 삶이라는 각본가는 종종 짓궂은 블랙 코미디를 즐긴다. 그 대사를 뱉은 건 나였지만, 정작 두 번이나 그 차에 실려 나간 것도 나였으니까.
상대의 기술에 휘말려 철제 링 기둥에 정면으로 충돌했다.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치아가 부러졌다. 링 바닥의 차가운 감촉을 느끼며 구급차로 옮겨졌다. 덜컹거리는 차 안,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 내 눈에 들어온 것은 흔들리는 천장 조명과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의 얼굴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태엽 감는 새’ 주인공이 우물 바닥에서 올려다본 하늘이 그랬을까. 몽롱한 시야 속, 내 부서진 얼굴을 붙잡고 있는 그는 르네상스 시대 프레스코화 속 천사처럼 보였다. 아니, 생과 사의 경계에서 나를 억지로 끌어올리는 그는 차라리 신(神)에 가까웠다.
그런데 지금, 한국 사회는 그 ‘신’들에게 기어이 수갑을 채우고 있다.
최근 부산에서 발생한 고교생 사망 사건을 보자. 경련을 일으킨 학생을 태운 구급차는 1시간 동안 거리를 표류했다. 8곳의 병원이 수용을 거부했다. 사람들은 이를 ‘응급실 뺑뺑이’라 부르며 의사들의 비윤리성을 성토한다. 정치권과 시민단체들은 "의사가 환자를 가려 받는다"며 징벌적 처벌을 요구한다. 그들의 주장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묻는 듯 비장하지만, 실상은 ‘누구를 제물로 삼아 분노를 해소하는가’에 가깝다.
사진출처 연합뉴스
냉정하게 이 비극을 복기해 보자. 왜 병원들은 학생을 받지 않았나. 의사가 없어서? 아니다. 법원이 요구하는 ‘완벽한 전문의’가 없어서였다. 소아신경과 전문의가 없는 상태에서 일반 응급의학과나 신경외과 의사가 진료했다가 결과가 나쁘면, 한국 법정은 여지없이 "전문의가 없는데 왜 진료했냐"며 수십억 원의 배상 판결을 내린다.
이 공포는 막연한 상상이 아니다. 2018년, 같은 건물내 한의원에서 봉침을 맞고 쇼크에 빠진 환자를 돕기 위해 달려갔던 가정의학과 의사를 기억하는가. 그는 자신의 병원 문을 박차고 나가 심폐소생술을 하고 에피네프린을 투여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었다. 그러나 돌아온 건 9억 원대의 손해배상 소송이었다. 비록 긴 법정 다툼 끝에 배상 책임은 면했으나, 그 과정에서 의사들은 확실한 교훈을 얻었다. "나서면 피고인이 된다."
국가는 한술 더 떴다. 이태원 참사 당시, 아수라장이 된 현장으로 달려간 재난의료지원팀(DMAT)에게 경찰은 무엇을 했는가. 4시간에서 7시간에 걸친 강도 높은 소환 조사를 벌였다.생명을 구하러 사지에 뛰어든 이들에게 "매뉴얼을 준수했느냐", "누구 지시를 받았느냐"며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했다.
데이터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한국 의사가 업무상과실치사상죄로 기소되는 비율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일본의 경우 의사 기소율이 6.5% 수준(혹은 통계에 따라 더 낮음)인 반면, 한국은 일본보다 수십 배, 많게는 265배나 더 많이 의사를 형사 재판정에 세운다. 영국이나 독일에서는 '고의'나 '명백하고 심각한 태만'이 아니면 의료 사고를 형사 범죄로 다루지 않는다. 형사처별 유죄율은 영국은 0.8% 한국은 21.7%다. 한국에서만 유독 의사의 메스가 범죄의 도구로 간주된다.
재판부의 취지대로라면, 응급실 문이 열리고 환자가 들어오는 그 찰나의 순간, 의사는 전지전능한 신이 되어야 한다. 진단은 오차가 없어야 하고, 수술은 완벽해야 한다. 단 1%의 불가항력적인 합병증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만약 신의 영역인 생사를 인간인 의사가 통제하지 못하면, 그는 즉시 '살인자'라는 타이틀을 달고 법정이라는 링 위에 서야 한다.
이것은 룰이 파괴된 잔혹한 프로레슬링이다. 링 밖에는 성난 관중(여론)이 있고, 심판(법원)은 의사에게만 불리한 룰을 적용한다. 상대 선수(질병과 죽음)는 반칙을 일삼는데, 의사가 최선을 다해 방어하다가 조금이라도 피를 튀기면 관중들은 의사에게 돌을 던진다. "왜 살리지 못했냐"고, "왜 완벽하지 않았냐"고.
시민단체와 정치인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은 의사가 정말 신이라고 믿는가? 신을 처벌할 수 있는가? 아니, 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내려와 실수를 했다 한들, 그것을 형법으로 다스려 감옥에 보내는 것이 정의인가?
내가 김미파이브 링 위에서 턱이 부서졌을 때, 나를 치료해 준 그 의사는 신이 아니었다. 그저 땀 냄새 나는 응급실에서 쪽잠을 자며 내 고통을 덜어주려 애쓴, 피곤한 눈을 가진 직업인이었다. 하지만 그 직업인이 범죄자가 되지 않기 위해 환자를 피해야만 하는 세상을 만든 건 누구인가.
응급실 뺑뺑이의 원인은 명확하다. 100%의 성공을 보장하지 못하면 파멸하도록 설계된 법적 구조 때문이다. 봉침 사건의 의사처럼 선의를 베풀어도 소송을 당하고, 이태원 현장의 의사처럼 헌신해도 경찰 조사를 받는 나라에서, 누가 감히 위험한 환자의 맥박을 잡겠는가.
링 줄에 튕겨 나와 바닥에 처박혔던 그날의 기억이 다시 떠오른다. 그때 나를 향해 달려오던 그 '천사'들은 이제 없다. 대신 방어 진료 기록을 남기는 데 급급한, 겁에 질린 인간들만 남았다.
누군가는 마이크를 잡고 호기롭게 외쳤던 내 대사를 기억할 것이다. "밖에 있는 앰뷸런스 보여?"
이제 그 앰뷸런스는 텅 비어 있다. 의사들이 떠난 자리에 남은 건 공허한 정의와 식어가는 환자뿐이다. 그리고 다음 차례는, 지금 의사에게 돌을 던지고 있는 바로 당신이 그 앰뷸런스에 타게 될지도 모른다. 그때 당신을 맞아줄 사람이 신이 아니라, 검찰의 공소장과 판사의 판결문을 두려워하며 뒷걸음질 치는 떨리는 손을 가진 인간이라면, 그 비극의 책임은 과연 누구에게 있는가.
김남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