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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6일, 리센코의 '거짓말'이 소련을 삼킨 날
  • 박주현 칼럼니스트
  • 등록 2025-12-26 12:43:46
  • 수정 2025-12-26 12:45:59

  • 1991년 오늘, 소련이 지도에서 사라졌다
  • 비옥한 흑토 지대를 '식량 수입국'으로 만든 나비효과, 마오쩌둥도 리센코를 숭배했다
  • 제사해보다 더 치명적이었던 '밀식'의 비극, 과학을 이념 아래 둔 대가는 '국가 부도'였다

그래픽 : A.I로 후보정한 트로핌 데니소비치 리센코

역사에는 기막힌 우연이 존재한다. 오늘, 12월 26일이 그렇다.


1991년 12월 26일, 소비에트가 해산을 선언하며 거대 제국 소련이 공식적으로 소멸했다. 총 한 방 쏘지 않고 무너진 날이다. 사람들은 의아해한다. 핵무기도 많고 땅도 넓은 나라가 왜 망했나. 유가 하락이나 군비 경쟁을 원인으로 꼽지만, 역사학자들이 지목하는 진짜 원인은 따로 있다. 시계를 60년이나 거꾸로 돌려, 1930년대의 한 남자를 봐야 한다. 바로 트로핌 리센코다.


많은 이들이 고개를 갸웃거릴 것이다. 1990년대의 패망을 왜 1930년대 과학자 탓으로 돌리느냐고. 이유는 간단하다. 그가 소련의 ‘밥줄’인 농업 생태계를 돌이킬 수 없이 망가뜨렸기 때문이다.


리센코의 주장은 기괴했다. 첫째는 ‘춘화처리(Vernalization)’ 맹신이었다. 그는 “씨앗을 차가운 물에 적셔 춥게 키우면, 그 내성이 유전되어 시베리아에서도 밀이 자란다”고 우겼다. 후천적 형질은 유전되지 않는다는 멘델의 법칙을 부정한 것이다.


둘째는 ‘밀식(密植)’ 이론이었다. “같은 계급인 노동자가 서로 돕듯, 식물도 같은 종끼리는 경쟁하지 않는다”며 벼를 빽빽하게 심으라고 강요했다. 과학이 아니라 이념이었다.


이 황당한 주장이 어떻게 당대 최고의 과학 대국 소련을 지배했을까. 바로 ‘정치’ 때문이다.


리센코의 이론은 스탈린의 구미에 딱 맞았다. “환경을 바꾸면 식물의 본성도 바뀐다”는 논리는, “자본주의적 인간도 시스템만 바꾸면 완벽한 공산주의형 인간으로 개조할 수 있다”는 변증법적 유물론과 완벽하게 결합했다. 과학적 팩트는 중요하지 않았다. 당(黨)의 이념을 뒷받침해 주는 이론이 곧 진리였다.


결과는 참혹했다. 리센코는 자신의 이론에 반대하는 정통 유전학자들을 ‘반동’으로 몰아 숙청했다. 식물학의 거두 니콜라이 바빌로프가 감옥에서 굶어 죽은 것이 상징적이다. 경쟁자가 사라진 운동장에서 리센코는 승승장구했고, 소련의 농업 생태계는 회복 불능의 상태로 망가졌다.


그 대가는 60년에 걸쳐 할부로 청구되었다. 우크라이나의 비옥한 흑토 지대를 가지고도 소련은 만성적인 식량 부족에 시달렸다. 1970~80년대, 소련은 최대 적성국인 미국과 캐나다에서 막대한 양의 밀을 수입해야 했다. 오일 쇼크로 번 돈을 식량 수입에 쏟아부었고, 유가가 떨어지자 경제는 버티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1930년대 리센코가 뿌린 ‘거짓의 씨앗’이, 1991년 12월 26일 ‘국가 부도’라는 청구서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공교롭게도 오늘(12월 26일)은 리센코의 이론을 맹신했던 또 다른 지도자, 마오쩌둥의 생일이기도 하다. 그는 참새를 죽이라했던 제사해운동으로 더 유명하지만 그또한 리센코의 열렬한 맹신자이기도 했다. 참새제거와 더불어 밀식이론으로 벼를 빽빽하게 심었다가 4천만 명을 굶겨 죽였다. 과학적 진실보다 ‘공산주의 이념’을 상위에 둔 대가였다.


이 오래된 비극이 2025년 대한민국에 던지는 경고는 여전히 유효하다. 리센코의 유령이 여전히 서울 상공을 떠돌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학도 과학이다. 돈을 막 찍어내면 화폐 가치가 떨어지고 물가가 오른다. 이건 만유인력처럼 거스를 수 없는 법칙이다. 그런데 지금 여의도에는 이 법칙을 부정하는 세력이 있다. 그들은 “우리의 돈 풀기는 민생을 위한 것이라 물가나 환율에 지장이 없다”고 믿는다. 리센코가 “동지 식물끼리는 경쟁하지 않는다”고 우긴 것과 판박이다. 그 맹목적인 믿음의 결과가 지금 경고등이 들어온 환율과 살인적인 물가다.


근래만 뒤져봐도 과학의 미신화도 여전하다. IAEA의 과학적 검증 결과는 무시하고 “오염수는 독극물”이라며 공포를 조장했다. 그 선동의 칼날에 베인 건 죄 없는 우리 어민과 횟집 사장들이었다. 정부는 이 근거 없는 공포를 달래겠다며 1조 5000억 원의 혈세를 허공에 날려야 했다. 사드 전자파 괴담으로 성주 농민들을 피멍 들게 하고도 사과 한마디 없던 그들이다.


리센코와 마오쩌둥또한 스스로 악마가 되려고 그런 게 아니었다. 인민을 위한다는 잘못된 확신에 차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무식이 신념을 가지고, 이념이 팩트를 덮어버릴 때 국가는 반드시 병든다.


12월 26일. 거짓이 쌓이고 쌓여 마침내 제국을 무너뜨린 이 날을 기억해야 한다. 팩트를 외면한 선동의 결말은, 60년 뒤가 아니라 당장 내일의 장부에서부터 드러날 것이다. 소련은 땅이라도 넓었지만, 우리는 기댈 곳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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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로필이미지
    atom07242025-12-26 15:16:52

    잘 읽었습니다.

  • 프로필이미지
    ddongong2025-12-26 14:33:21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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