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 : 다사다난 했던 2025년도 저물어간다
2025년의 마지막 달력이 한 장 남았다. 창밖의 바람은 날카로워졌고, 서재의 공기는 한층 가라앉았다. 한 해를 마치며 지난 시간들을 복기해보니, 올해도 세상은 참으로 시끄러웠다. 도처에서 정의를 부르짖는 함성이 터져 나왔고, 저마다의 확신이 광장을 가득 메웠다. 그 소란스러운 풍경 속에서 내가 기댈 곳은 오직 낡은 책장뿐이었다.
처음엔 그저 노랫말 한 줄 더 잘 써보려고 책을 들었다. 단어의 맛을 배우고 문장의 결을 익히다 보니, 어느새 독서라는 깊은 숲에 발을 들였다. 그 숲에서 만난 이른바 ‘지식인’들의 현란한 말법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나도 저들처럼 내 생각을 근사하게 표현하고 싶다." 그 순수한 열망이 오랜기간 나를 이끌었다.
하지만 숱한 해가 지나고 또 한 해가 저무는 지금, 내 손에 남은 것은 지적 희열이 아니라 거대한 부끄러움이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책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깨달은 것은 '무지의 자각'이었다. 세상은 내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넓고 역사는 아득히 깊은데, 내가 아는 것은 고작 모래사장 위의 모래알 하나에 불과했다. 그 깨달음은 나를 작게 만들었고, 무엇이 정답이라 말하기를 주저하게 했다.
진짜 비극은 그다음에 마주한 풍경이다. 내가 지식의 무게에 짓눌려 침묵할 때, 광장의 마이크를 독점한 ‘오만과 독선의 기술자’들은 단 한 순간의 성찰도 없이 세상을 호령했다. 그들에겐 ‘틀릴 수도 있다’는 의심이 없었다. 자신의 일천함을 모르는 채 비대해진 자아는 흉기가 되어 타인을 난도질했다. 언뜻 더닝 크루거 효과와 비슷하게 느껴지는 '무식한 자는 용감하고, 현명한 자는 비겁하다.'는 말이 2025년 대한민국을 관통하는 가장 잔인한 진리였음을, 한 해의 끝자락에서 새삼 절감한다.
문득 서글퍼진다. 부끄러움이 거세된 폐허 같은 세상에서, 지금의 청년들은 대체 누구의 등을 보며 이 겨울을 건너야 할까. 확신에 찬 목소리로 궤변을 토하는 사기꾼들을 리더로 착각하고 따라가야 하는가, 아니면 구석에서 "나는 아직 멀었다"며 고뇌하는 진짜 어른들을 찾아내야 하는가. 아마도 후자는 너무 조용해서, 소음이 지배하는 이 도시에서 그들의 존재를 알아채기란 불가능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깊은 사색은 때로 사람을 참 외롭게 만든다. 위선의 틈새를 보고, 양심의 가책을 홀로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2025년은 그 외로움이 유독 짙었던 해였다.
하지만 잊지 말자. 당신이 한 해 동안 느껴온 그 지독한 부끄러움이야말로 우리가 괴물이 되지 않았다는 유일한 증거다. 오만함으로 무장한 가짜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여전히 자신의 부족함에 얼굴을 붉힐 줄 아는 당신이야말로 이 시대가 간절히 기다려온 진짜 ‘어른’이다.
2026년의 태양이 뜬다고 해서 세상이 갑자기 정결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여전히 ‘빈 깡통’들은 요란하게 정의를 연기할 것이고, 양심은 언제나 그랬듯 서재 구석에서 침묵할 것이다. 그러나 그 작은 부끄러움들이 모여 가짜들의 소음을 잠재우고, 이 미쳐 돌아가는 세상을 다시 인간의 자리로 돌려놓으리라 믿는다.
한 해 동안 고독하게 자책하고, 고민하며, 부끄러움을 간직해온 당신의 그 귀한 마음을 응원한다. 괴물들의 시대, 당신의 부끄러움은 당신을 지키는 가장 아름다운 훈장이다. 수고 많으셨다. 그리고 여전히 이 시대를 같이 부끄러워해 주셔서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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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현 칼럼니스트 다른 기사 보기
이 기사에 1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박주현 님과 같은 용기있는 분들의 외침이 있었기에 외롭지않게 버틸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