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의 시간 그리고 겸손이라는 링 위에서
2026년 박스원 고수 승급 그리고 프로레슬링 데뷔 25주년을 맞이하며
2022년 7월 28일이었다. 그해 여름의 공기는 유난히 끈적거렸다. 바이러스가 전 지구를 점령했던 시절, 우리는 마스크라는 얇은 부직포 한 장에 의지해 서로의 호흡을 경계해야 했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축축한 마스크가 입가에 달라붙던 그 불쾌한 감각을 기억한다. 그날 나는 서울 일산에 위치한 복싱 짐, '박스원(BOX-1)'의 문을 열었다. 이미 프로레슬링으로 만든 몸이었지만 새로운 도장(道場)의 문지방을 넘는 일은 언제나 심장 박동을 미세하게 빠르게 만든다. 박스원은 단순한 체육관이 아니다. 이곳은 땀의 정직함을 믿는 이들이 모인 성소(聖所)와 같다.
나는 그곳에서 다시 '관원'이라는 이름표를 달았다. UFC와 WWE의 해설위원으로 수많은 파이터들의 승리를 중계하고, 12권의 책을 써내며 세상에 내 목소리를 내왔지만, 링 위에서는 그 모든 이력이 무화(無化)된다. 오직 두 주먹과 가쁜 호흡, 그리고 흔들리는 다리를 지탱하는 의지만이 남을 뿐이다. 그로부터 3년하고도 5개월이 흘렀다. 2025년 12월 30일, 나는 박스원의 '고수(高手)' 승급 심사를 받았다. 보통의 무술 심사가 격렬한 스파링이나 형(形)의 시연으로 이루어지는 것과 달리, 이곳의 마지막 관문은 50분간의 압박 면접이었다. 링 위가 아닌 테이블 위에서 이루어진 정신의 스파링. 코치진은 집요하게 물었고, 나는 내 안의 격투 철학을 남김없이 끄집어내어 방어하고 반격해야 했다. 그 50분은 지난 3년간 흘린 땀방울의 밀도를 증명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고수'라는 칭호를 얻었다.
2023년 OYF 경기 출전후 인터뷰중에서 한컷
고수. 무협지에서나 볼 법한 이 단어는 21세기의 체육관에서 묘한 울림을 갖는다. 무술을 수련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누군가를 쓰러뜨리기 위함인가? 젊은 날의 나는 그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쉰을 넘긴 지금, 내게 무술은 육체의 한계를 확인하고 그 너머의 겸손을 배우는 과정이다. 샌드백을 칠 때마다 전해져 오는 타격음은 내 오만함을 깨트리는 소리와도 같다.
작년 한 해, 나는 총 143회의 복싱 훈련을 소화했다. 일주일에 평균 3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혹은 컨디션이 난조를 보이는 날에도 체육관으로 향했다. 매년 100회 이상의 훈련을 거르지 않았다. 일본의 유명한 소설가가 매일 아침 달리기를 하며 소설을 쓸 체력을 비축하듯, 나는 글을 쓰고 방송을 하기 위해, 아니 어쩌면 그저 살아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글러브를 꼈다. 누군가는 물을 것이다. 이미 20년 넘게 격투기를 해온 사람이, 매해 100번 넘게 기본기를 반복하는 것이 지겹지 않냐고. 하지만 격투기의 아이러니이자 가장 매혹적인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잽(Jab) 하나를 십만 번 뻗어도, 십만 한 번째의 잽은 여전히 불완전하다. 기본을 갈고닦는 일에는 끝이 없다. 아무리 해도 부족함이 남는다. 그 결핍을 메우기 위해 우리는 다시 링 위에 오른다. 완성은 없고 오직 과정만이 있을 뿐이라는 사실, 그것이 나를 계속해서 움직이게 한다. 지겨운 섀도복싱을 반복하며 내 안의 야성을 조련한다. 2026년 새해가 밝았다. 올해는 내게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2001년, 풋내기 프로레슬러로 링 바닥을 처음 굴렀던 때로부터 정확히 25년이 되는 해다. 사반세기. 강산이 두 번 반이나 변하는 시간 동안 나는 링 안과 밖을 오가며 치열하게 살았다. 때로는 선수로, 때로는 해설가로, 때로는 작가로.
이제 나는 PWS(Pro Wrestling Society)의 대외협력이사이자 대한프로레스링협회의 부총장이라는 중책을 맡고 있다. 이는 명예직이 아니다. 실질적인 성과를 보여주어야 하는 자리다. 한국 프로레슬링의 부흥이라는 무거운 과제가 내 어깨 위에 놓여 있다. 하지만 행정가로서 책상 앞에만 앉아 있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나는 여전히 현역이다. 올해 나의 목표는 명확하고도 무모하다. 25주년 기념 프로레슬링 시합을 치를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프로복싱 라이센스를 취득하고 실제 프로복싱 시합에 출전할 계획이다. 멈춰있는 물은 썩기 마련이고, 도전하지 않는 근육은 퇴화한다.
나는 내 육체가 허락하는 한, 아니 허락하지 않는 한계점까지 나를 밀어붙여보고 싶다. 복싱 글러브 안에서 쥐어지는 주먹의 감각, 그 묵직한 물성을 믿는다. 박스원에서의 수련은 나에게 '더 배우고 겸손하라'는 가르침을 주었다.
'고수'가 되었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배움의 자세가 비로소 갖춰졌다는 뜻일 게다. 기본기가 부족함을 알기에 더 많이 배우겠다는 다짐, 그것이 51세의 파이터가 링을 대하는 태도다. 이 거친 항해에 여러분과 함께함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링 위에서는 누구나 혼자지만, 그 링을 지켜보는 시선들이 있기에 파이터는 외롭지 않다. 공이 울리면, 나는 다시 코너를 박차고 나갈 것이다. 가드가 내려가지 않도록 턱을 당기고, 두 눈은 상대를, 그리고 나 자신을 똑바로 응시한 채로.
김남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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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 3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멋지세요!!
훈프로님 25주년이 있어 올해가 풍성해지는 이유가 될거같아요 스포츠는 살아있다! 리복!
프로레슬링과 격투기 그리고 권투
김남훈 프로님의 도전은 언제 끝날까요?
그 와중에 방송과 글쓰기까지
바쁘다고 투덜거리는 내 자신이 얼마나 나태한가 오늘도 반성 또 반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