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나의 좌파탈출기
  • 박주현 칼럼니스트
  • 등록 2025-09-10 18:17:36
  • 수정 2025-09-10 18:23:05

그래픽 : 박주현

-"나의 좌파 탈출기"라고 거창한 제목을 달았지만, 사실 하나의 글에 그 긴 여정을 쓰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여전히 쉽지 않은 일이지만, 줄이고 줄여 큰 기둥이 되는 이야기만 써보자면 다음과 같다.


모든 것은 한 정치인의 이름에서 시작되었던 것 같다. 이.재.명. 이 세 글자가 나에게 일종의 ‘빨간 약’을 먹였다고 말하면 지나친 희화화일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이름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올 때마다 수십 년간 내 세계를 지탱해온 단단한 벽에 실금이 가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믿음이란 본래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거대한 망치질 한 번이 아니라, 거의 알아챌 수 없는 미세한 균열들이 축적되어 한순간에 모든 것을 무너뜨린다.


나의 세계, 그러니까 50대 초반의 남자가 일생의 대부분을 ‘좌파’ 혹은 ‘진보’라 믿어온 그것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기억은 1980년대의 마포대로변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해외 순방에서 돌아온 대통령을 환영하기 위해 동원된 중학생의 손에 들린 작은 태극기. 그 플라스틱 손잡이의 감촉. 나는 그 어색한 환영의 대열 속에서, 며칠 뒤 친구의 집에서 몰래 돌려보던 ‘광주 비디오’의 조악한 화면을 떠올리고 있었을까. 세상은 선과 악, 가해자와 피해자, 부패한 권력과 의로운 저항으로 명확히 나뉘어 있었다. 촌지를 받고 학생을 때리던 교사들은 학생 시위를 경멸했고, 올곧아 보이던 소수의 교사들은 저항을 옹호했다. 세상의 작동 원리는 그토록 단순해 보였다.


그 믿음은 단단했다. 2002년의 월드컵 함성 속에서 세상이 바뀌었다고 느꼈을 때조차, 나는 그 변화의 공이 당연히 ‘우리’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보수 우파를 지지하는 삶은 내 인생의 선택지에 없었다. 그것은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거의 생리적인 혐오감에 가까운 것이었다. 광우병 논란에 분노했고, 한 전직 대통령의 죽음에 진심으로 슬퍼했다. 세월호 아이들의 죽음 앞에서는 이토록 유능한 국가가 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가에 대한 무력감으로 분노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은 선동과 감상이 뒤섞인 분노였을지 모르지만, 당시의 나에게는 의심할 여지 없는 정의였다. 무능한 정권은 끝나야만 했다.


그렇게 우리는 원하던 시대를 맞았다. 하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승리 이후에 찾아온 것은 성찰이 아니라, 더 견고한 교리였다. 우리 편의 실수에는 관대했고, 반대편의 모든 것에는 악의를 부여했다. 한 정치인의 이름은 그 모든 모순을 집약한 상징처럼 다가왔다. 그의 많은 혐의와 수준낮은 행동과 거친 언어와 표리부동한 태도를 비판하는 동지들은 ‘수박’이나 ‘똥파리’로 불리며 축출당했다. 시간은 흘러 이제는‘2찍’이라는 단어 아래,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시민들은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전락했다. 민주라는 이름을 단 전체주의의 탄생. 그것은 내가 한때 믿었던 진보의 풍경이 아니었다.


한때 내가 정의라 믿었던 진영은, 마치 오래전 즐겨 듣던 카세트테이프 같았다. 너무 많이 들어 늘어지고, 음정이 미세하게 뒤틀렸지만 익숙함 때문에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다 어느 날 전혀 다른 오디오 시스템에 그 테이프를 넣고 재생한 순간, 나는 처음으로 그것이 얼마나 끔찍하게 변질되었는지를 깨달았다. 이제 나는 그 테이프를 틀지 않는다. 믿음의 벽이 무너져 내린 자리에 서서, 나는 폐허가 된 풍경을 그저 바라볼 뿐이다. 무엇을 다시 세워야 할까. 애초에 세울 것이 있기는 했을까. 바람이 불어와 귀에 익은 소음 같은 먼지를 흩날렸다.


TAG

프로필이미지

박주현 칼럼니스트 다른 기사 보기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로그인

댓글 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이 기사에 11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 프로필이미지
    idt4m2025-10-11 23:56:23

    유구무언이오...

  • 프로필이미지
    guest2025-09-27 00:32:47

    매우 공감합니다ㅠㅠ

    더보기
    • 삭제
  • 프로필이미지
    guest2025-09-27 00:12:51

    공감갑니다ㅜ ㅜ
    내란팔이당에 놀아나는거 보면 슬퍼여

    더보기
    • 삭제
  • 프로필이미지
    guest2025-09-16 00:13:10

    변명 하나는 기가막힌 2찍 내란 옹호자들 ㅋㅋ

    더보기
    • 삭제
  • 프로필이미지
    guest2025-09-11 18:28:13

    나 또한 이재명이 때문에 민주당과 진보세력의 민낯을 보게 되었지
    더 이상 지지할수 없는 세력들...

    더보기
    • 삭제
  • 프로필이미지
    ddongong2025-09-11 15:27:28

    저를 비롯해 공감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 같아요.

  • 프로필이미지
    guest2025-09-11 10:26:29

    어줍잖은 정의감에 도취되어 묻지마 지지를 하며 열광했던 그때가 부끄러운게 나뿐인가 하노라며 위안 삼습니다.

    더보기
    • 삭제
  • 프로필이미지
    wiinp72025-09-11 08:29:38

    구구절절 공감이 가는 글입니다. 탈출 경로가 거의 비슷하네요. 이재명을 알기 전에는 세상을 보는 눈이 이분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죠.  '폐허가 된 풍경' 현실을 보여주는 적절한 표현 같습니다.

  • 프로필이미지
    guest2025-09-11 07:47:49

    '정의로운 나'에 취해 부끄러운 줄 모르던 주변 동지(이젠 쓰고 싶지 않은 말)들때문에 회의감이 들던 차에 이재명이 등장하면서 진영을 버렸습니다.
    깊이 공감합니다.

    더보기
    • 삭제
  • 프로필이미지
    nosmoking762025-09-11 05:35:32

    어떤 유튭방송을 보니 공산주의이론의 토대가 되는 농업혁명 관련내용을 산업혁명으로 대체하면서 산업혁명이야 말로 공산주의 완성의 열쇠인듯한 말이 나오더군요. 한 30분정도 보다 말았는데..아마 중국이 부상하면서 나온 일종의 수정이론인듯 한데...걱정되는게 우리나라 산업화를 모두 부정하고 진정한 산업화를 새로 해야 한다고 우기지 않을지 걱정입니다. 망상이길...

  • 프로필이미지
    woenfow932025-09-10 18:32:52

    저도 이재명이 빨간약이었어요
    이재명을 알기 전과 후로 제 인생이 진실에 눈을 떴으니까요

아페리레
웰컴퓨터
많이 본 뉴스더보기
  1. 미국이 대신 싸워주는 대한민국의 '언론 자유' 새해 벽두부터 한미 관계에 경고등이 켜졌다. 미국 국무부가 한국의 ‘정보통신망법 개정안’ 통과에 대해 “중대한 우려”를 표명했고, 예정됐던 한미 FTA 회의는 돌연 취소됐다. 미국이 타국의 국내법에 이토록 즉각적이고 강경하게 반응하는 건 이례적이다.이유는 명확하다. 이 법이 겉으로는 ‘가짜 뉴스 근절’을 내...
  2. 진실게임 격화.... 쿠팡, "국정원 직원 3명 만나…강에서 증거 건지라 말해" 쿠팡은 최근 발표한 개인정보유출의 자체 조사 결과와 발표해 국가정보원의 협조에 따른 것이라고 31일 거듭 주장했다.이재걸 쿠팡 법무 담당 부사장은 이날 국회 청문회에서 '국정원이 일방적으로 용의자를 접촉하라고 지시했느냐'는 최민희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장의 질의에 "(국정원이) 12월 1일 처음 공문을 보내고, '국가..
  3. "이재명에게 보고됐다" 김현지의 음성, 그리고 피의자에게 돌아간 탄원서 더불어민주당 김병기 의원이 지난 총선을 앞두고 구의원들로부터 공천 대가성 금품을 수수했다는 의혹이 당시 이재명 당 대표실에 보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직적으로 은폐되었다는 정황이 담긴 녹음 파일이 확인됐다. 이수진 전 의원은 5일 조선일보와의 단독 인터뷰를 통해 김현지 당시 대통령실 제1부속실장(당시 보좌관)과의 통화 내...
  4. 전두환이 무덤에서 기립박수 칠 '민주당의 독재론' 2026년 새해 벽두, 여의도에서 귀를 의심케 하는 말이 들려왔다. 민주당 박주민 의원이 “국민은 돈만 벌게 해주면 독재도 환영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농담이 아니었다. 진심이었다.이 말을 듣는 순간, 연희동 어딘가에서 기립박수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다. 그가 살아서 이 말을 들었다면 무릎을 치며 반겼을...
  5. [칼럼] 오죽했으면 노조가 나서서 "대형마트 규제 풀어달라" 외칠까 오죽했으면 노조가 나서서 "대형마트 규제 풀어달라" 외칠까정치인들에게 '반(反)기업 정서'만큼 달콤한 마약은 없다. 거대하고 탐욕스러워 보이는 '공룡(대기업)'을 사냥하여 마을 사람들(소상공인)에게 고기를 나눠주겠다는 서사는 얼마나 매혹적인가. 지지자들에게는 정의 구현이라는 '도파민'을, 정치인에게는 표심이..
  6. [종합]이혜훈 '갑질'에 민주당 '폭발'… 사퇴론 들불처럼 이재명 정부가 '국민 통합'과 '경제 전문성'을 명분으로 내세운 이혜훈 기획예산처 장관 후보자 지명이 거센 역풍을 맞고 있다. 후보자의 과거 '12·3 내란' 옹호 전력에 이어 인턴 직원을 향한 충격적인 폭언 녹취가 공개되면서,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내부에서조차 "선을 넘었다"는 비토론이 쇄도하고 있다. "너 아이큐 ..
  7. [칼럼] 대통령의 자격 국가 지도자의 자격은 어디서 오는가. 헌법과 법률이 정한 권한 이전에, ‘우리가 누구이고, 적이 누구인가’를 구분하는 명징한 인식에서 온다. 그런데 2026년 대한민국, 국군 통수권자의 입에서 그 인식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발언이 나왔다.“우리가 북한에 대해 군사적 공격 행위를 해서 그들이 불안해했을 것이다.”귀를 의심...
  8. 새미래민주당, 정당 최초 웹드라마 <강소의 기적, 새민상사> 제작 발표 새미래민주당(새민주)은 8일(목) 국회 소통관에서, 정당사 최초 정치풍자 웹드라마  제작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당일 오후 2시30분에는 서대문구에 위치한 소극장 '필름포럼'에서 시즌1을 공개하는 시사회도 예정되어 있다.웹드라마에서 '새민상사 대표'로 분한 새미래민주당 전병헌 대표는 이번 시도를 "대한민국 ...
  9. 김병기 고발만 11건, 서울경찰청 통합 수사 착수…가족까지 수사 더불어민주당 김병기 전 원내대표를 둘러싼 각종 비위 의혹이 경찰 수사로 간다. 서울경찰청은 31일, 김 전 원내대표와 관련된 고발 사건 11건 중 10건을 공공범죄수사대에 모아 통합 수사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민주당 내 도덕성 논란이 확산되는 가운데, 보좌진의 녹취록 등 구체적 증거가 쏟아지면서 사법 처리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
  10. 베네수엘라 노벨 평화상 수상자 '마차도' "자유의 시간 도래했다" 지난해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베네수엘라 야권 지도자, 마리아 코리나 마차도(58)가 미국의 베네수엘라 타격과 니콜라스 마두로(63) 대통령 부부 체포 조처에 지지 의사를 표명했다.마차도는 3일(현지시간) 자신의 엑스(X·옛 트위터)에 게시한 성명에서 "베네수엘라에 자유의 시간이 도래했다!"라며 "우리는 질서를 세우고, 정치범을 석방.
후원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