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 : 박주현 팀버튼 감독도 참 괴짜지만 그의 영상은 대니 앨프먼의 음악없인 존재하기 힘들었을테다.
팀 버튼 감독이 서울에 다녀갔다. 한 세대의 유년기를 지배했던 기괴하고 아름다운 상상력의 주인이 남긴 말, “조금 이상한 것이 사실 정상”이라는 문장은 잊고 있던 기억의 잠금장치를 푸는 열쇠가 되었다. 굳게 닫혔던 문이 열리자 쏟아져 나온 것은 낡은 필름의 이미지가 아니라, 공기 중에 흩어지는 희미한 선율이었다.
기억은 서가(書架)와 같다. 시간의 먼지가 뽀얗게 쌓인 책들 사이, 어떤 책은 제목만 봐도 내용이 떠오르지만, 어떤 책은 무심코 펼친 페이지의 바랜 삽화 하나가 통째로 잊었던 세계를 눈앞에 복원시킨다. 내게 영화 음악은 종종 그 결정적 삽화의 역할을 한다. 스토리는 희미해지고 배우의 얼굴은 흐릿해져도, 단 한 줄의 멜로디는 스크린의 차가운 공기, 극장 의자의 삐걱거림, 심지어는 그 영화를 함께 봤던 사람의 희미한 온기까지 총천연색으로 소환해내는 힘을 가졌다.
팀 버튼의 방문은 내 기억의 서가에서 ‘대니 엘프먼’이라는 이름이 붙은 낡은 책 한 권을 꺼내 들게 했다. 그는 단순히 영화에 배경음을 입히는 작곡가가 아니었다. 그는 음표라는 물감으로 기괴하고 아름다운 세계의 풍경을 그리고, 그 세계에 사는 고독한 영혼들의 내면을 소리로 조각한 예술가였다. 그의 음악을 듣는 것은 영화를 '다시 보는' 행위를 넘어, 내 안의 '이상하고 소중한 아이'와 재회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어쩌면 모든 음악감독이 꿈꾸는 서로의 세계관을 완벽히 이해하는 찰떡궁합의 페르소나와 수십년을 협업하는 아름다운 현실이 부러운 것도 사실이다.
넷플릭스 시리즈 '웬즈데이' 시즌2 내한 기자간담회, 팀 버튼 감독 (서울=연합뉴스) 첫 장을 넘기면, 모든 것의 시작이었던 광적인 유쾌함이 터져 나온다. <피위의 대모험>의 주제곡 그중에서도 "Breakfast Machine"을 뽑아봤다. 꿀벌의 비행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 같은 장난기 넘치는 선율이 매력적이다. 모든 우주에는 빅뱅이 있다. '버튼-엘프먼 유니버스'의 빅뱅은 바로 이 혼돈의 서커스 같은 음악이었다. 질서 정연한 할리우드 한복판에 떨어진 불협화음. 그것은 앞으로 펼쳐질 모든 기이하고 아름다운 서사의 유쾌한 선전포고였다.
다음 장은 칠흑 같은 어둠으로 채워져 있다. <배트맨>의 테마가 묵직하게 깔린다. 고담의 어둠은 그저 검은색이 아니었다. 엘프먼의 음악 속에서 그 어둠은 고딕 성당의 첨탑처럼 날카로웠고, 박쥐의 날갯짓처럼 비극적이었으며, 영웅의 고뇌처럼 서늘한 습기를 머금고 있었다. 그의 음악이 없었다면 배트맨은 그저 갑옷 입은 부자에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엘프먼은 그에게 그림자뿐만 아니라, 그림자 속에서 흐느끼는 영혼을 부여했다.
책의 가장 깊은 곳, 마음이 가장 시린 페이지에는 만질 수 없는 것들의 음악이 흐른다. <가위손>의 선율이다. 첼레스타의 투명한 소리는 차가운 가위 끝에서 피어나는 얼음 조각의 결정(結晶)이 되고, 나직이 흐르는 합창은 창밖으로 내리는 눈송이가 되어 소리 없이 흩어진다. 껴안고 싶지만 껴안을 수 없는 존재의 슬픔, 사랑하지만 상처 입힐 수밖에 없는 운명의 잔인함이 이토록 투명한 소리의 아름다움으로 기록될 수 있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잠시 말을 잃는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창조주가 자신의 창조물 속으로 직접 걸어 들어가는 순간과 마주한다. 잭 스켈링턴의 목소리로 노래하는 엘프먼 자신을 만나는 <크리스마스의 악몽>이다. 그는 단순한 음악 감독이 아니라, 핼러윈 마을의 소동과 크리스마스의 설렘 사이에서 방황하는 주인공 그 자체였다. 이 기묘한 뮤지컬 속에서 그의 목소리는, 자신의 창조물을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사랑했는지에 대한 가장 내밀한 고백처럼 들린다.
이 짙은 고딕풍 서가의 흐름을 잠시 벗어난, 가장 뜻밖의 자리에 닳고 닳은 첩보물 한 권이 꽂혀있다. <미션 임파서블>. 이는 마치 한 가지 배역에만 능한 줄 알았던 위대한 배우가 전혀 다른 가면을 쓰고 나타나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과 같다. 익숙한 얼굴 아래 꿈틀거리는 엘프먼 특유의 광기. 그것은 팀 버튼의 세계 밖에서, 그의 예술적 DNA가 어떻게 생존하고 변이하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흥미로운 기록이다.
결국 대니 엘프먼의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한 편의 영화를 추억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의 ‘정상성’이라는 따분한 프레임에 자신을 억지로 끼워 맞추기를 거부했던 우리들 각자의 고독하고 아름다웠던 순간들을 위한 사운드트랙을 찾아내는 여정이다. 팀 버튼이 떠난 서울의 밤, 나는 그의 영화를 다시 보는 대신 엘프먼의 플레이리스트를 켰다. 효율과 규격, 진영의 논리가 모든 것을 재단하는 이 시대에,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기묘한 선율은 내 안의 잠자고 있던 ‘별종’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리고 있었다. 아직 여기에 있느냐고, 사라지지 않았느냐고.
아 그리고 오늘의 리스트에서 스파이더맨, 헐크등의 작품이 빠졌다고 서운해하지말자. 언젠가 추가로 다룰 날이 있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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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 4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팀 버튼, 대니 엘프먼. 재밌게 읽었어요. 응원합니다
아 웬즈데이가 팀버튼이 연출한 거군요 그럼 봐야겠네요
대니 엘프먼도 좋아합니다 음악 오랜만에 잘 듣겠습니다
음악들이 다 좋았는데 이분이군요. 이름 기억해야겠어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