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곤란했던 일이 떠오른다.
한참 평산책방 인근이 집회로 시끄러울 때, 대통령을 괴롭히는 사람들을 법적조치 해 달라는 요구가 많았다. 내 트위터 디엠과 이메일은 민원센터 같았다. 대통령 부부가 고통 받을 것을 생각하니 분노로 치가 떨려 잠도 제대로 못 잔다고 호소했다. 가슴이 찢어질 것 같단다. 종종 양산을 찾아 멀리서나마 안위를 살핀다고 한다.
정작 양산 그 분은 휴가철에 여행도 하고(시민들과 밝게 웃으며 찍은 사진을 보았다), 평소에 등산과 여가생활도 하고, 정치한다는 손님들 환대하며 식사도 하고(담장 밖 사람들에게 친절히 손도 흔들어 주고), 트윗과 인스타 등 sns 활동도 적절히 하며, 정치계 원로로서 존재감을 누리고 있었다.
누가 누구를 걱정하는가?
내가 익명을 버리게 된 계기는 정치인을 비판 했다는 이유로 무더기 고발 당한 사람들을 돕게 되면서부터다.
공적 검증을 받아야 할 정치인이 감히 주권자를 고발한 사건에 대해 세상이 너무도 조용했다. 좋은 세상 만들자고 외치던 사람들, 민주주의를 위해 일생을 바쳤다는 사람들도 이 일에는 벙어리를 자처 했다. 나설 사람이 있었다면 지금도 난 익명일텐데 그러지 못했다. 정치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취약한 주권자에게 무게를 실어 주는 일, 그런 자리가 내가 있어야 할 곳이라 생각했고 지금까지 그렇다. 양산의 일은 내 몫이 아니었기에 모두 거절했다.
그 분은 변호사쯤이야 얼마든지 선임할 힘과 돈이 있고 요령도 밝은(본인도 변호사다) 분이다. 실제로 필요하다 싶으면 그 누구보다 신속하고 강력하게 법적조치를 하더라. 연예인 걱정보다 더 쓸 데 없는 오지랖이 정치인에 대한 것이라 생각한다. 자신은 고통 받고 힘들어도 그 분은 행복해야 한다는 심리가 참 낯설었다. 그에게 ‘아버지’라 부르며 그렇게 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불효자’ 프레임을 씌우는 모습은 참 기괴했다. 나에게도 아버지가 저렇게 고통 받는데 왜 방관 하냐며 핀잔 주는 사람도 있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이 어찌 내 아버지인가? (그럼 김어준은 작은 아버지?) 그 열정과 시간을 자기 부모와 가족에게 쓰기에도 부족하지 않은가?
이른바 혜경궁김씨 트윗(수사 결과 성남시장의 집과 직무실에서 작성된 것이다)에 노통은 물론, 책방 대통령과 그 아들까지 조롱하고 비하한 내용이 있었는데, 이에 대한 그의 태도를 보고 나는 일찌감치 마음을 접었다. 진영주의가 아니고는 설명되지 않았다(난 진영주의가 망국의 길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내 평생 양산 책방 갈 일이 없다고 공언하기도 했다(여전히 그러하다). 일찌감치 sns 맞팔을 정리하고 차단했다. 그가 싫어서가 아니라 여전히 앞으로 나가야 하는 내 멘탈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였다.
그 대가로 나는 평생 듣지 못한 여러 쌍욕을 들었다. 정치인의 무차별 고발에 맞서 내가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도 그 중에 있었다.
정치는 도구다. 주권자의 기본권을 지키기 위한 제도다. 태생이 그렇고 현재도 그렇다.
주권자가 본분을 잃으면 선동가와 사기꾼이 민주주의를 병들게 한다. 사람은 약하고 모순되며 불완전하다. 누구나 그렇기에 그 자체는 흠이 아니다. 문제는 내가 선호하는 사람에 대해 예외를 두려는 욕심이다. 그건 허상이다.
정치인에 의해 정치가 좌우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주권자의 몫이 된다. 인류가 값비싼 비용을 들여 제도와 시스템에 공적자원을 투입하는 이유다. 제도와 시스템은 가치를 담는 그릇이다. 가치를 중심에 두면 사람에 대한 집착은 희석된다. 그래야 정치인도 주권자의 눈치를 보며 그 가치를 지키려는 동기를 갖는다. 반대로 정치인을 쫓다 보면 어느새 돌아갈 집(가치)을 잃을 수 있다. 좋아하는 정치인이 있다면 그 사람이 아니라 그가 내세운 가치를 지키자. 그 가치를 지키는 것이 그를 지키는 힘이 되어 줄 것이다.
주권자의 역할은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을 지키는데 있다. 그래야 제대로 된 정치인에게 운신의 폭이 생긴다. 그래서 나는 사람만 도드라지는 정치판에 극도의 이물감을 느낀다. 사람만 바뀌어 가며 반복되는 현실이 피곤하다. 지금은 그 정점을 달리는 듯 하다.
일상을 더 소중히 (그래픽-가피우스)
이럴 때 중요한 것은 각자의 일상이다. 정치에 함몰되지 않고 자기의 일과 가족과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자. 나라가 위험할 때 결국 지탱해 낸 것은 정치가 아니라 일상의 삶을 지키려 애썼던 민중이었다. 정치에 쏟던 에너지를 가족에게, 나에게 고마웠던 사람에게 나눠 보자. 정치 때문에 외면하고 놓쳤던 것이 있는지 살펴보자. 그러면 정치에 대해서도 관조적이 될 수 있고 싸울 힘도 생긴다. 시간도 잘 간다(#1759). 팍팍한 현실이 달라질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내 마음 상태는 조절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마음과 생각을 다듬으며 이 터널 같은 시간을 건너 보자.
#1759
이 기사에 20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이 터널같은 시간의 끝이 있으리라 기대하며 깊이 공감합니다
이제야 김변님의 모든 말들이 와닿네요.
양산 사저앞 혼란에 비나치게 감정 이입을 했던 일도 그렇고. 가치를 지키는 것, 시스템을 지키는 것이 유권자의 할일이라는 말. 새겨야 겠어요.
단비같은 말씀이네요. 위로가 됩니다.
김변님 말씀에 공감합니다
김변님이 참 좋아요. ♡
시간이 지나니 알 게 되는게 있네요. 구불구굴한 길에서 만나기도 하고 갈림길에서 헤어지는 거죠
동감합니다
참 좋은 글입니다. 공감하며 읽습니다. 함께 해주셔서 감사하고 든든합니다. 오늘도 소중한 일상을 누릴 수 있는 행운에 감사합니다~
좌절에 빠진 나같은 이에게 깊은 위로와 용기를 주는 글. 김변, 고맙습니다.
워딩 하나하나 다 옳으신 말씀.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을 지켜야 한다. 깊이 새깁니다
잘 읽었습니다.
"정치는 도구다. 주권자의 기본권을 지키기 위한 제도다. 태생이 그렇고 현재도 그렇다.
주권자가 본분을 잃으면 선동가와 사기꾼이 민주주의를 병들게 한다.
...............
누가 누구를 걱정하는가. 내 일상을 소중히 하자."
김변님이 전하는 귀하신 말씀, 꾹꾹 담아 갑니다.
공감이 많이 되는글 입니다
저도 진작에 알고 느꼈어야할 내용입니다. 이제라도 인물아 아닌 가치를 중심에 두어야겠습니다.
참 사람...
존경합니다
김변님 말씀에 공감합니다.
기사 읽는 내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늘 좋은 기사 감사해요.
항상 여러모로 애써주셔서 감사하그 든든합니다.
저도 매몰되지않고 자신과 가족에 집중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가치관이 변하는건 아니니까요.
힘들어도 옳게 가는쪽에 서보려고 최소한의 힘을 내고 있습니다.감사합니다.
기사 잘 읽었습니다. 주권자는 가치에 중심을 두어야하며 시스템을 지켜야한다. 정치인에 중심을 두면 작금의 정치 상황만 반복이 될 뿐이다. 그리고 일상의 삶을 지켜라,
김변님 글은 항상 마음을 정리하고 생각할 여유를 갖게 합니다. 감사해요~
큰 위안을 얻은 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