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 : 박주현 현실을 떠나는 데 목적을 둔다면 독서는 최고의 여행이다.
여행은 현실을 떠나는 데 그 의미가 있다. 이 명제에 충실하다면 폭염과 경비라는 현실적인 어려움을 피해 방구석에도 얼마든 떠날 수 있는 여행이 있다.
때마침, 최근 출판계에서는 이창동 감독의 초기 소설집 『소지』, 배수아 작가의 『철수』, 그리고 전혜린이 번역한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등 한 시대를 풍미했던 문학 작품들이 잇따라 재출간되고 있다는 뉴스에 이젠 단출해져 버린 책장으로 다가선다.
나도 분명히 가지고 있었다는 기억에 책장을 뒤지며 그렇게 여행은 시작된다. 책장 한구석,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모를 낡은 책 한 권. 출처도, 구입한 시점도 가물가물한데 분명 내 책이었다. 무심코 펼친 책장을 넘기다 말고, 삐뚤빼뚤한 연필 밑줄 하나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틀림없는 내 필체. 하지만 아무리 들여다봐도 알 수가 없었다. 대체 어린 시절 나는 이 평범한 문장의 어디에 마음이 흔들려 이토록 정성껏 밑줄을 그었던 걸까. 기억나지 않는 감동의 흔적 앞에서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과거의 나와 나누는 가장 서투르고, 가장 진솔한 대화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우리가 이창동의 오래된 소설과 배수아의 낯선 문장, 그리고 수십 년 전의 번역으로 다시 나온 고전들을 펼쳐 드는 이유는 단순히 ‘좋은 이야기’를 읽기 위함만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그 낡은 책갈피 사이사이에 끼워둔 ‘과거의 나’를 만나기 위해 그 책을 찾는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너무나 선명하고 확실해서 오히려 불안했던 시절의 나, 섣부른 열정과 서툰 위로를 끌어안고 있던 나. 그 책을 처음 읽었을 바로 그 시절의 나 자신과 재회하기 위해서 말이다.
한 권의 책을 다시 읽는다는 것은 저자와 대화하는 동시에, 그 책을 읽던 ‘과거의 나’와도 마주 앉는 일이다. ‘이 문장, 아직도 좋으니?’, ‘이 대목에선 왜 화가 났어?’, ‘이 결말이 그렇게 슬펐어?’ 책장을 사이에 두고 현재의 내가 묻고, 과거의 나는 답이 없다. 그저 침묵하는 과거의 나를 대신해 기억을 더듬을 뿐이다.
이 느리고 서툰 대화는 잊고 있던 감정의 좌표를 다시 확인하게 하는, 나 자신에 대한 따뜻한 고고학이다.
스크롤과 ‘좋아요’가 인간관계의 깊이를 대체하는 시대에, 낡은 책 속 밑줄은 ‘원래의 너’는 이런 사람이었다고 나지막이 속삭인다. 그 목소리는 꾸짖거나 평가하지 않는다. 그저, 당신이 지나온 시간 역시 당신의 일부였음을 따뜻하게 인정해줄 뿐이다.
좋은 이야기는 시간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온전히 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 속에는 언제나 풋풋하고 미숙했던, 그래서 더 애틋한 어제의 내가 살고 있다. 오늘, 당신의 책장에 잠들어 있는 낡은 책 한 권을 꺼내 먼지를 털어내 보자.
책을 읽을 때도 배경음악은 필수다. 하지만 독서의 와중에 여러 음악을 오가는 것만큼 정신 사나운 일이 없으니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는 모음집으로 골랐다. 가수 아이유(IU)의 리메이크 앨범 ‘꽃갈피’ 시리즈를 들을 때, 나는 책과 비슷한 종류의 감동과 마주한다. 너무 평범한 거 아니냐 투털대실 수도 있으나, 책을 읽을 때는 이런 게 되려 장점이 된다. 그는 김광석과 조덕배 같은 선배 세대의 명곡을 가져와 자신의 목소리로 다시 부른다. 이것은 단순한 커버나 재현이 아니다. 원곡이 쌓아온 시간의 결을 존중하면서도, 지금 세대의 감각으로 그 노래의 의미를 새롭게 번역해 내는 섬세한 작업에 가깝다. 낡은 책 속에서 내 어릴 적 밑줄을 발견하고 과거의 나와 대화하듯, 우리는 아이유의 목소리를 통해 시간을 넘어선 노래의 영혼과 만난다.
오래된 책을 들고 앉아 유튜브 클릭 한 번이면 바캉스는 이미 시작이다. 그렇게 가다 보면 당신이 까맣게 잊고 있던 당신의 밑줄이, 노래의 선율을 타고 당신에게 가만히 안부를 물어올지도 모를 일이다.
이 기사에 8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눈이 나를 배신하기 전에 더 많이 읽었어야 했는데...하는 요즘입니다. 노안이 오니 활자에 대한 집중력이 갑자기 뚝 떨어지더라고요. 좀 슬픕니다
좋은 글에 잠시 힐링했어요.
예전에 우울감이 심해져서 몇년을 회복 못한적이 있었는데 자존감도 바닥을 쳐 오랜 친구 앞에서도 말이 제대로 안 나오고 그랬었던거든요
근데 십년도 전에 쓴 블로그 일기들을 보니까 제가 유치하긴 해도 나름 밝았더라구요
어느새 나 자신에 대한 기억도 왜곡하고 있었구나 싶고 그 뒤로 회복이 가능해졌어요
기사 읽다 보니까 생각이 나네요
좋은 음악 잘 듣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ㅇㅇ
언제나 다시 생각할 꺼리를 주셔서 재미나게 읽고 있어요~
칼럼 너무 잘 읽었습니다
언제나 입체적 시각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