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사나이에게 보내는 작별인사
응급의학과 의사이자 작가인 곽경훈 선생의 북토크가 있던 날이었다. 그의 신간 ‘곽곽선생뎐 2’ 를 기념하는 자리였다. 곽 선생은 오랜 시간 주짓수를 수련해온 단단한 몸을 가졌는데 그 탓에 종종 프로레슬러가 아니냐는 오해를 받는다고 했다. 그는 웃으며 손사래를 쳤지만 그 오해는 어쩌면 그에게 어울리는 훈장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프로레슬러로 오해받는 의사와 진짜 프로레슬러인 내가 마주 앉았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링 위의 신화로 흘러갔다. WWF(현 WWE)와 헐크 호건.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같은 이름을 입에 올리며 소년 시절의 흥분을 공유했다.
집으로 돌아와 무심코 휴대전화를 들여다본 순간 나는 활자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헐크 호건 사망’ 세상에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조합이라는 것이 있다. ‘영원한 이별’이라든가, ‘차가운 태양’ 같은 것들. ‘헐크 호건의 죽음’ 역시 그중 하나일 터였다. 그의 별명은 ‘불멸(The Immortal)’이 아니었던가. 불멸의 사나이가 죽었다. 이토록 완벽한 모순이라니.
불멸의 사나이 헐크호건 (사진=헐크호건 인스타그램)
어떤 일이 벌어지기 위해서는 수많은 우연이, 혹은 누군가의 말처럼 신의 섭리가 겹쳐야만 한다. 나의 유년기는 송신국민학교 교실 한편에 꽂혀 있던 계몽사의 그리스 로마 신화 전집과 함께였다. 제우스와 헤라클레스, 아폴론과 아테나. 올림푸스의 신들이 펼치는 장엄한 서사에 매료된 나는 닳고 닳은 책장을 매일같이 넘겼다. 아마 백 번은 족히 넘게 읽었을 것이다.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던 그 장대한 신화의 세계가 현실에 구현된 것은 토요일 오후 브라운관(LCD가 아니라 정말 브라운관이다)을 통해서였다. AFKN 채널에서 방영되던 프로레슬링. 화면 속 사각의 링은 현대의 콜로세움이었고, 그 중심에 노란 트렁크를 입은 근육질의 사나이가 포효하며 서 있었다. 헐크 호건. 나는 직감했다. ‘이거구나.’
소년의 세계는 그날로 완벽하게 재편되었다. 링 위의 신들은 그리스의 신들보다 더 생생하고 강렬했다. 그들은 땀 흘리고 고통스러워했으며 분노하고 환호했다. 그 세계에 온전히 경도된 나는 혹여나 방송이 결방되어 제너럴 호스피털’ 같은 드라마가 연이어 나올 때면 TV 앞에서 나오지도 않는 영어로 욕설을 퍼부으며 세상을 원망했다.
그 신화에 대한 동경은 결국 내 삶의 경로를 결정했다.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기까지에는 실로 아찔한 우연의 연쇄가 필요했다. 청주 상당공원 앞 빵집에서 나의 부모님이 맞선을 봐야 했고 군 제대 후 복학한 아버지가 4학년 때 어머니와 속도위반을 해서 본가로부터 쫓겨나듯 송탄에 신접살림을 차려야만 했다. 이 대목이 중요하다. 우리가 터를 잡은 곳은 미군부대 정문 바로 앞이었고, 덕분에 우리 집 텔레비전에서는 채널 2번, AFKN이 나왔다.
만약 이 ‘문화적 월담’이 불가능했다면, 만약 내가 실시간이나 다름없는(실제로는 2주 정도의 시차가 있었지만) 방송으로 그를 접하지 못했다면, 나는 아마 다른 세계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소년중앙’이나 ‘어깨동무’를 읽으며 선장이나 소방관, 혹은 의사 같은 ‘매우 불경한’ 꿈을 꾸었을지도 모른다. 훗날 ‘소년챔프’ 같은 만화잡지에 브로마이드가 실리고 비디오테이프로 경기가 출시되기까지는 1, 2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나는 그 누구보다 먼저, 가장 순수한 형태로 신의 강림을 목격한 행운아였던 셈이다.
그렇게 나는 과천 경마장에 세워진 특설 링에서 프로레슬러로 데뷔했고, 종합격투기 UFC와 프로레슬링 WWE의 해설위원이 되어 마이크를 잡았다. 그의 부고를 접하자, 문득 2015년의 한 장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레슬매니아 31을 앞둔 샌프란시스코 페어몬트 호텔. 전 세계 미디어를 위한 인터뷰 장소에서 나는 그를 아주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화면 속에서 혹은 만화책 브로마이드 속에서만 존재하던 신이 불멸의 육신을 가지고 내 눈앞에 서 있었다. 생각보다 크지 않다고 느꼈던 것도 잠시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존재감 앞에서 나는 그저 어린 시절의 소년으로 돌아갈 뿐이었다.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과장이 섞인 팬의 예찬이 아니라, 담담한 사실의 기록이다. 링 위에서 포효하던 한 사나이가 지구 반대편의 작은 마을에 살던 소년의 인생을 통째로 바꾸어 놓았다. 그는 내 유년의 신이었고 청년의 이정표였으며 중년이 된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거대한 뿌리였다.
곽 선생과의 북토크에서 시작된 상념은 불멸의 사나이가 떠났다는 소식과 함께 하나의 거대한 마침표를 찍는다. 그는 떠났지만 그가 만든 세계는 여전히 수많은 소년들의 가슴속에서 살아 숨 쉴 것이다. 나의 그랬던 것처럼.
잘 가시라, 헐크 호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