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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30km의 공포 그리고 ‘장발장’이라는 기만
  • 김남훈 기자
  • 등록 2025-12-10 15:33:46

30km의 공포 그리고 ‘장발장’이라는 기만 


나는 몸을 쓰는 사람이다. 링 위에서 턱이 돌아가는 훅을 맞아보았고, 매트 위에서 경동맥이 조여드는 초크를 견뎌보았다. 타격의 고통은 정직하다. 뇌가 흔들리고 시야가 끊어지지만, 공이 울리면 고통은 과거가 된다. 심판이 있고, 룰이 있고, 링닥터가 대기한다. 그것이 내가 평생을 바친 ‘폭력’의 세계, 즉 스포츠다. 하지만 룰이 사라진 폭력, 압도적인 힘의 불균형 속에서 자행되는 야만은 스포츠가 아니다. 그것은 영혼을 살해하는 행위다.
2025년 겨울, 대한민국은 배우 조진웅이라는 거대한 아이러니 앞에 서 있다. 영화 ‘경관의 피’에서 보여준 그 우직한 신념, 드라마 ‘시그널’의 이재한 형사가 뿜어내던 "포기하지 않는 정의"의 눈빛은 이제 대중의 기억 속에서 길을 잃었다. 그가 고교 시절, 훔친 차량으로 피해자를 납치해 30km를 끌고 다니며 특수강도강간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드러난 탓이다.
나는 이 사태를 접하며 해설위원 시절 모니터를 응시하던 기분으로 돌아갔다. 승패는 이미 났다. 그러나 링 사이드의 코치진—여기서는 소위 진보 진영의 지식인들—이 수건을 던지기는커녕, 반칙패한 선수를 영웅으로 둔갑시키려 든다. 그들은 조진웅을 빅토르 위고의 ‘장발장’이라 부른다. 나는 이 비열한 은유에 대해, 그리고 연기라는 가면 뒤에 숨은 실체적 공포에 대해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 '돌이킬 수 없는'의 한장면 (영화 속 장면 갈무리)


30km, 영혼이 마모되는 거리
"24일 오후 11시 30분께 서울 서초구 방배동 ''카페골목''에서 택시를 기다리던 황모양(18.무직)등 2명을 "집까지 데려다주겠다"며 훔친 슈퍼살롱 승용차로 유인,경기 성남시 분당구 새마을연수원 부근 공터로 끌고가 번갈아 성폭행한 뒤 60여만원을 빼앗는 등" 당시 한국경제신문 발췌
격투기에서 3분 1라운드는 영원과도 같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근육이 비명을 지르는 시간이다. 범인 일당들이 피해자를 납치해 방배동에서부터 분당까지 이동한 거리는 국도를 이용하면 30km나 된다. 시속 60km로 달린다고 해도 30분이 꼬박 걸리는 거리다. 그 시간 동안, 폐쇄된 차량이라는 밀실 속에서 피해자가 겪었을 공포의 질량을 나는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돌이킬 수 없는(Irreversible)’이라는 영화가 있다. 가스파 노에 감독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파괴된 일상이 얼마나 처참한지를 보여준다. 성폭력은 육체에 새겨지는 문신과 같다. 지워지지 않는다. 30km의 이동은 단순한 공간의 이동이 아니다. 피해자의 존엄이 1km마다, 1분마다 가해자들의 시선과 폭력, 그리고 희롱 속에서 깎여나가는 과정이다. 그것은 우발적 실수가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유희로 삼은 ‘과정적 폭력’이었다.
배우 조진웅은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연기'조차 인간의 영혼을 얼마나 깊게 갉아먹는지를.  배우들의 증언을 들어보자.
드라마 ‘구해줘’에서 사이비 종교와 성적 위협에 갇힌 피해자를 연기했던 배우 서예지는 촬영 기간 내내 가위에 눌리고 실제 우울증을 앓았다고 고백했다. 영화 ‘나를 기억해’의 이유영 역시 범죄의 타깃이 된 인물을 연기하며 "감정이입을 하다 보니 세상이 무섭고 피폐해지는 경험을 했다"고 토로했다. 할리우드의 조디 포스터는 ‘피고인’의 집단 성폭행 장면을 촬영한 후 며칠 동안 몸을 떨며 씻어내지 못할 모멸감에 시달려야 했다. 
7년전 내가 조연으로 출연했던 KBS 다큐드라마 ‘인간의 조건’에서 같은 부족 속 여성을 연기한 배우는 갓난 아이를 잃는 장면을 10여분 남짓 촬영하고 감정을 추스르지 못해 1시간 가까이 인형을 붙잡고 꺼이꺼이 울다가 멈추기를 반복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이들은 약속된 세트장에서, 안전장치를 갖추고, 신뢰하는 동료들과 '가짜'를 연기했을 뿐이다. 감독의 '컷' 소리가 들리면 스태프들이 달려와 담요를 덮어주고 삼다수를 들고나와 목을 축여주며 괜찮냐고 묻는 환경이다. 그런데도 배우들은 그 찰나의 간접 경험만으로 수면 장애를 겪고 트라우마 상담을 받는다. 뇌가 가짜 고통조차 진짜로 착각하여 영혼에 생채기를 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묻겠다. '컷' 소리도 없고, 담요를 덮어줄 스태프도 없으며, 30km의 질주 끝에 낯선 곳에 버려진 '진짜' 피해자의 고통은 어떠했겠는가. 조진웅은 배우다. 몰입의 고통을 아는 자다. 가짜 지옥조차 그토록 고통스럽다는 것을 아는 자가, 타인에게 진짜 지옥을 선사하고는 뻔뻔하게 스크린 뒤로 숨었다. 이것은 단순한 범죄가 아니라, 인간성에 대한 배신이다. 
성폭력은 성이 아니라 폭력에 방점을 둬야한다. 욕정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지배욕구를 실현하기 위해서 성을 사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현장은 매우 참혹하다. 피해자는 손가락이나 팔이 골절되고 충격에 몸을 뒤틀다가 척추가 부러지거나 맞거나 부딛쳐서 코가 부러지거나 공포에 덜덜 떨다가 이가 부러지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그럼에도 수많은 명망가들은 조진웅을 옹호하며 ‘장발장’을 호출했다. 문학적 무지이거나, 의도적인 곡해다. 장발장은 굶주린 조카를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쳤다. 그는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타인의 생존을 위해 죄를 지었고, 이후 평생을 속죄하며 자신의 신분을 감춘 채 타인을 위해 살았다.
조진웅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의 범죄 동기는 생존이 아닌 욕망이었다. 그는 신분을 숨기고 속죄하는 대신, 대중의 사랑을 먹고사는 스타가 되었다. 광복절 경축식 단상에 올라 태극기 앞에서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낭독했다. 이것은 속죄가 아니라 기만이다. 빵을 훔친 자와 영혼을 파괴한 자를 동일선상에 놓는 것, 이것이 진보 진영이 말하는 ‘인권’인가? 조지 오웰이 보았다면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하지만 어떤 동물은 더 평등하다"는 문장을 "모든 범죄자는 평등하다, 하지만 우리 편 범죄자는 장발장이다"라고 고쳐 썼을 것이다.
영화는 편집된다. 지루한 장면은 잘려나가고, 영웅의 과오는 플래시백으로 미화된다. 하지만 삶은 롱테이크다. 컷 소리가 나도 고통은 이어진다. 피해자는 조진웅이 나오는 영화 포스터를 볼 때마다, 그가 TV에서 호탕하게 웃을 때마다, 30년 전 그날의 차 안으로 강제 소환되었을 것이다.
나경원 의원이 발의를 예고한 '공직자 및 사회적 유력 인사 소년기 흉악범죄 공개법'은 늦었지만 필요한 질문을 던진다. 미성년자의 갱생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 갱생의 결과가 피해자를 기만하고, 대중을 속이며, 부당한 사회적 권력을 누리는 것이라면, 사회는 그 가면을 벗겨낼 권리가 있다. 디스패치 기자들을 고발하며 '법치'를 운운하는 변호사의 모습에서, 나는 법 기술자의 서늘한 칼날을 본다. 그 칼 끝은 정의가 아니라 진실을 겨누고 있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그 30km의 길 위에서, 피해자는 얼마나 간절히 누군가가 문을 열어주길 바랐을까. 얼마나 간절히 이 끔찍한 라운드가 끝나길 기도했을까. 하지만 공은 울리지 않았고, 심판은 없었다.
지금 우리 사회가 해야 할 일은 가해자를 위해 장발장의 노래를 불러주는 것이 아니다. 배우들조차 연기하기 힘겨워하는 그 지옥을 맨몸으로 견뎌낸 피해자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헤아리는 것이다. 정의는 가해자의 눈물이 아니라, 피해자의 회복에서 시작된다. 
2025년의 대한민국이, 적어도 ‘시그널’의 이재한 형사가 부끄러워하지 않을 세상이기를 바란다. 피해자의 시선에서 생각해보자. 국회의원이, 서울대 법대 교수가, 정당 대표가 심지어 신부까지 가해자의 은퇴를 안타까워한다. 이보다 더 큰 공포가 어디 있을까. 링 위에는 수건이 날아들 수 있지만, 피해자의 삶에는 고통을 대신 끝내줄 수건 따위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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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rrp04712025-12-12 11:50:49

    기사 잘 읽었습니다. 미약하나마 원고료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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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uest2025-12-11 14:17:00

    " '컷' 소리도 없고, 담요를 덮어줄 스태프도 없으며, 30km의 질주 끝에 낯선 곳에 버려진 '진짜' 피해자의 고통은 어떠했겠는가. 조진웅은 배우다. 몰입의 고통을 아는 자다. 가짜 지옥조차 그토록 고통스럽다는 것을 아는 자가, 타인에게 진짜 지옥을 선사하고는 뻔뻔하게 스크린 뒤로 숨었다. 이것은 단순한 범죄가 아니라, 인간성에 대한 배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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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uest2025-12-10 23:31:01

    생각만 해도 당시의 끔찍했던 상황이 상상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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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uest2025-12-10 19:53:04

    기사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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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uest2025-12-10 17:41:25

    요즘 저들의 만행을 보면 분노를 억누를 수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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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dongong2025-12-10 15:42:52

    피해자는 안중에도 없는 저 집단. 재활용도 안될 듯요.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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