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숲을 걷다 보면 바닥에 떨어진 낙엽들 사이로 오묘한 냄새가 난다. 개중에는 잘 마르고 발효되어 흙으로 돌아가는 그윽한 향기가 있는가 하면, 물기를 머금은 채 질척하게 썩어가는 쿰쿰한 악취도 있다. 인간의 나이 듦도 이와 다르지 않다. 시간은 공평하게 흐르지만, 그 시간이 인간이라는 그릇에 담길 때는 전혀 다른 화학 작용을 일으킨다. 우리는 그것을 '숙성'이라 부르기도 하고, '부패'라고 부르기도 한다.
최근 인터넷 공간을 떠도는 어떤 기이한 발언을 들으며 나는 문득 썩어가는 악취를 맡았다. "내가 너희보다 섹스를 백배는 더 많이 했다." 자신을 '영포티'라 칭하는 말에 발끈한 40대 남성이 20대 청년들을 향해 내던진 일갈이었다. 소설 속 인물이 이런 대사를 했다면, 나는 그를 내면이 텅 비어버린, 그래서 과거의 육체적 쾌락 외에는 자신을 증명할 방법이 없는 비극적인 캐릭터로 묘사했을 것이다.
육체의 경험을 훈장처럼 내세우는 것은 유아기적 나르시시즘의 전형이다. 아이들은 "우리 아빠 차가 더 비싸"라며 싸우지만, 어른이 되어서도 "내가 더 많이 놀아봤다", "내가 더 많이 즐겨봤다"며 수량적 경험으로 타인을 압도하려는 태도는, 사실 그 내면이 얼마나 불안하고 외로운지를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나이는 먹었으되 성숙하지 못한 자아는 타인의 인정을 먹어야만 생존할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끊임없이 무리를 짓고, 소음을 만들어내며, 타인의 삶에 감 놔라 배 놔라 간섭한다. 그 소란스러운 조언과 과시는 "나를 좀 봐달라"는 처절한 인정투쟁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사진 : 몇 년 전 부산 국제영화제로 한국을 찾았던 윌리엄 데포
그 끈적한 욕망의 소음 반대편에, 마치 잘 마른 고목처럼 서 있는 한 노배우를 본다. 윌리엄 데포. 깊게 패인 그의 주름은 그가 살아온 치열한 연기 인생의 지형도와 같다. 누군가 그에게 배우가 되고자 하는 이들에게 조언의 말을 묻자,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는 조언하지 않습니다(I don't give advice). 누구나 스스로 길을 찾아야 하잖아요.(Everybody's gotta find a their own way)."
그의 거절은 차라리 시(詩)에 가깝다. 그는 안다. 인간은 저마다의 고유한 슬픔과 기쁨을 안고 캄캄한 숲을 헤쳐나가는 단독자임을. 내가 걸어온 길이 타인에게는 지도가 될 수 없음을 뼈저리게 아는 사람만이 침묵할 수 있다. 섣부른 조언은 때로 타인의 고유한 삶을 침범하는 폭력이 된다는 사실을, 그는 오랜 세월 인간의 내면을 탐구하며 깨달았을 것이다.
"그저 즐겨라(Just Enjoy)." 그가 덧붙인 이 짧은 문장은 무책임한 방관이 아니라, 타인의 실존을 온전히 긍정하는 축복이다. 흙탕물에 빠진 발을 잠시 빼줄 수는 있어도, 결국 두 다리로 일어서서 걷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진정한 어른은 앞장서서 "나를 따르라"고 외치는 자가 아니라, 뒤에서 묵묵히 자신의 삶을 살아냄으로써 타인의 배경이 되어주는 자다.
나이 듦은 상실의 과정이다. 피부의 탄력을 잃고, 기억력을 잃고, 사회적 지위를 잃어간다. 하지만 그 상실의 자리에 무엇을 채우느냐가 노년의 품격을 결정한다. 누군가는 그 빈자리를 "내가 왕년에"라는 과거의 망령과 "너희는 아직 멀었다"는 꼰대의 오만으로 채운다. 그것은 부패다. 반면 누군가는 그 자리를 침묵과 여백, 그리고 타인에 대한 깊은 존중으로 채운다. 그것은 숙성이다.
화면 속 윌리엄 데포의 얼굴에는 평온함이, 누군가의 말에는 저급함과 조급함이 묻어난다. 우리는 모두 늙는다. 하지만 어떻게 늙을 것인가는 선택할 수 있다. 자신의 경험을 무기 삼아 휘두르는 소음이 될 것인가, 아니면 타인의 성장을 조용히 지켜보는 넉넉한 숲이 될 것인가.
가을바람이 차다. 내 안에서는 어떤 냄새가 나고 있는지, 옷깃을 여미며 킁킁거려 본다. 부디 썩어가는 악취가 아니라, 잘 익어가는 냄새이기를 바라며.
필자를 감동시킨 윌리엄데포 길거리 인터뷰 영상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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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 9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스스로 잘, 제대로 나이 들어가고 있는가.. 생각해보게 됩니다.
감동적인 인터뷰, 감동적인 칼럼
잘 숙성된 삶의 향기에 취합니다. 고맙습니다.
"내 안에서는 어떤 냄새가 나고 있는지, 옷깃을 여미며 킁킁거려 본다. 부디 썩어가는 악취가 아니라, 잘 익어가는 냄새이기를 바라며."
어른으로서 살기 힘든 사회를 물려 준 것에 대한 미안함 이라고는 1도 없고 2030 청년들이 차도 집도 없다고 조롱하던데 자기들은 2030대 때 차와 집이 있었는지 있었다면 그 차와 집은 스스로 마련한건지 의심스럽습니다 챙피함은 멀쩡한 사람들 몫인가 봅니다
많이 공감되되고 또 반성도 하게되네요.
칼럼이 넘넘 좋아요.
훔쳐가서 꼭꼭 숨겨놓고 자주 들여다 보고 싶을만큼요.ㅎㅎ
북마크, 공유, 전달합니다.
늘 귀감이 되는 좋은 글 올려주셔서 고맙고 감사합니다^^
이렇게 좋은 글들을 자주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타이틀부터 예술작품입니다
"내가 걸어온 길이 타인에게는 지도가 될 수 없음"
정말 묵직한 문장이라 외워 두려고요
살면서 누가 해주던 조언들이 하나도 도움이 안 되었던 경험이 많아 저도 섣부르게 누군가에게 조언이랍시고 입 털지 않으려고 합니다
칼럼마다 레전드 갱신 하시는 거 같아 다음에는 어떤 글을 쓰실까 늘 기다립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