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반중시위를 꺵판이라 규정했던 이재명 대통령
캄보디아에서 한국인이 조직범죄의 표적이 되어 문자 그대로 ‘사냥’당하고 있다. 이 끔찍한 현실 앞에서 "전쟁이라도 선포할 각오로 임해야 한다"거나 "최소한 중국인 무비자 입국이라도 재검토하자"는 절박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혐오'라는 붉은 딱지가 날아들었다. 일부 언론은 이를 '극언'과 '혐오 정치'라 규정했고, 순식간에 논점은 피 흘리는 '국민의 안전'에서 고고한 '혐오 발언'으로 옮겨붙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땅에 새로 생겨난 기이한 종교, '반(反)혐오교'의 실체가 드러난다. 그 종교에는 '혐오'라는, 모든 논쟁을 단칼에 끝장내는 성스러운 단어가 있다. 그 단어는 절대선(絶對善)의 상징이자, 토론의 장에 던져진 수류탄과 같다. 일단 터지면 이성적인 논의의 가능성은 산산조각 나고, 반대편은 그저 부도덕한 야만인으로 낙인찍힐 뿐이다. '혐오'라는 단어의 선언은, 복잡한 현실을 외면하고 싶은 이들을 위한 지적 게으름의 VIP 라운지나 다름없다.
물론 "전쟁 선포"는 외교가의 언어라기엔 투박하다. 하지만 소말리아 해적에게 피랍된 우리 선원들을 구출하기 위해 청해부대를 급파했던 '아덴만의 여명 작전'을 떠올려보면, 그것은 '대화와 타협'이라는 고상한 수사를 버리고, 국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국가는 기꺼이 야수가 될 수 있다는 의지를 전 세계에 보여준 사건이었다. 지금의 현실이 그때보다 덜 심각한가? "그 정도 각오로 임하라"는 외침의 본질까지 '혐오'라는 딱지로 봉인하는 것은 과연 온당한가.
이 지점에서 '혐오'라는 단어를 무기처럼 휘두르는 이들이, 정작 자신들의 정치적 반대편의 '자국민'을 향해 얼마나 쉽게 혐오의 언어를 내뱉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그것은 이제 이 땅에서 너무나 흔하고 진부한 풍경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교묘하고 본질적인 문제는, '혐오'라는 단어가 어떻게 현실을 왜곡하고 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책무마저 마비시키는가에 있다.
잠시 '혐오'라는 고고한 강론을 멈추고, 테이블 위에 놓인 제안의 실체를 들여다보자. 지금 누구도 모든 중국인을 추방하거나 인천공항에 만리장성을 쌓자고 주장하지 않는다. 제안은 지극히 상식적이다. '무비자'라는 프리패스를 없애고, 최소한 우리 땅에 들어오는 사람이 누군지 서류라도 한번 들여다보자는 것이다. 이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향해 그들은 '혐오'라 소리친다.
그렇다면 묻자. 병적기록이나 범죄기록 하나 확인할 길 없는 이들에게 대문을 활짝 열어주며 사실상 자국민에게 ‘당신들의 안전은 우리의 최우선 관심사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행위는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가. 굳이 그 성스러운 단어를 써야겠다면, 바로 그것이야말로 가장 소름 끼치는 혐오, 즉 자국 공동체를 향한 서늘한 무관심이자 진짜 혐오가 아닌가.
국가는 추상적 이념의 순결성을 지키는 도덕 강의실이 아니다. 피와 살을 가진 국민이 외부의 위협 앞에서 공포에 떨 때, 가장 먼저 달려가 총을 들어주는 현실적인 경호원이다. 우리는 지금, 경호원의 팔다리를 '폭력적'이라며 묶어놓고, 강도의 침입을 '대화로 풀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위선에 너무 오래 속아온 것은 아닌가. 그들이 만든 '혐오'라는 신성하고도 이상한 사전에서 이제는 걸어 나와야 할 때다.

박주현 칼럼니스트 다른 기사 보기
이 기사에 7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누구보다 더 혐오를 잘하는 이들이 정치적으로 필요할 때만 저러니 더 웃겨요
자국민의 안전보다 중요한게 어디있나요. 아 대통렁 본인의 안전?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정말 맞말만 하십니다..
대한민국을 깽판쳐놓는 이재멍
국민 70가 중국을 혐오하는 데 저러는 건 개인적 이득이 있거나 공산주의자 이거나
방구석여포라는 말도 아까운..큰걸 바라는게 아니고..그거 우리 국민들 안전하게 하자는대..그거도 못하는..글 감사합니다.
이텅 정부는 대체 어느 나라 정부인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것보다 중요한 게 뭔지 모르겠어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