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집권 세력에게 ‘1987년’은 신화(神話)이자 전리품이다. 그들은 민주화를 이뤄냈다는 단 하나의 업적으로 시대의 모든 빚을 청산했다고 믿는다. ‘87년 체제’의 설계자라는 완장은, 그렇게 평생의 훈장이 되었다. 그런데 역사의 아이러니는 언제나 가장 공들여 쌓아 올린 신화의 한복판에서 시작되는 법이다. 그들이 평생의 업적이라 말하는 ‘87년 이후의 세상’은, 자신들이 허물었다고 믿었던 과거를, 제 손으로 충실히 복원하고 있다는 섬뜩한 진실 말이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 시위대와 진압하는 경찰, 서울역 앞, 1987_구와바라 시세이.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공]
스스로를 ‘역사의 설계자’라 믿는 자들의 오만에서 모든 퇴행은 시작된다. 그들은 국가 시스템을 국민의 것이 아닌, 자신들이 쟁취한 사유물로 취급했다. 그 첫 번째 증거가 바로 ‘초토화 작전’이라 불릴 만한 전임 정부 인사 찍어내기였다. 국가의 연속성이나 국익 따위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오직 ‘우리 편이 아닌 사람’을 덜어내는 정치 보복의 쾌감만이 중요했다. 캄보디아 대사관의 지휘관 자리가 후임자도 없이 텅 비어버린 것은 그 오만의 필연적 결과였다. 한 젊은이가 그 외교 공백의 틈으로 빨려 들어가 목숨을 잃고, 두 달이 넘도록 시신조차 돌아오지 못하는 굴욕은, 시스템이라는 교향악의 지휘자를 스스로 내쫓은 자들이 맞닥뜨린 첫 번째 불협화음이었다.
지휘관이 사라진 진지에서 병사들은 각자도생하기 마련이다. 시스템이 붕괴된 대사관에서 남은 것은 ‘책임감’이 아니라 ‘매뉴얼’뿐이었다. 납치를 피해 구사일생으로 대사관 문을 두드린 또 다른 피해자에게, 대한민국 공무원은 위로와 보호 대신 “현지 경찰에 직접 신고하라”거나 “업무 시간에 다시 오라”는 말을 건넸다. 인간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믿기 힘든, 책임의 완전한 증발을 선고하는 목소리였다.
이 참사는 이 정부의 본질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지금 대한민국 어디에서도, 국가 시스템이 맡은 바 역할을 충실하고 원활하게, 또 정상적으로 작동이 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다. 국가는 마비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마비는 선택적이다. 정부라는 유기체가 제대로 작동될 때는 단 한 순간뿐이다. 바로 온갖 불똥이 대통령에게 튀는 것을 막아야 할 때다. 그때가 되면, 이 정부는 시스템이 아니라 ‘점조직’으로 움직인다. 모든 부처와 기관은 국가 운영이라는 본분을 잊고, 오직 최고 권력자를 보호한다는 단 하나의 목표를 위해 온몸을 던지는 친위대처럼 작동한다.
국가의 퇴행은 비단 외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국가 시스템의 곳곳이 87년 이전의 어둠 속으로 회귀하는 풍경을 목도하고 있다. 특검의 수사를 받던 공무원이 목숨을 끊고, 피를 토하는 유가족의 절규에도 특검은 유서 전문을 공개하지 않는다. 진실은 권력의 입맛에 따라 편집되고 은폐되던 시절의 망령이 되살아나고 있다.
그렇기에 국가의 기둥들은 필연적으로 무너져 내린다. 자신들을 향한 칼날을 무디게 만들 목적으로 검찰의 수사권을 박탈하고, 대법관 수를 늘려 사법부를 ‘우리 편’으로 채우려는 시도는, 그 ‘점조직’의 생존을 위협하는 모든 외부 견제 장치를 제거하려는 본능적 몸부림이다. 원-달러 환율이 1400원대를 넘어 서민들이 비명을 질러도 강 건너 불 구경하듯 하는 태도 역시 마찬가지다. 이너서클의 안위와 무관한 국민의 고통 따위는 그들의 우선순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투명성은 점조직의 가장 큰 적이다.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한다는 제1부속실장은 이름 석 자를 빼고는 모든 것이 베일에 싸인 ‘유령’이다. 집권 여당은 온몸으로 그의 국정감사 출석을 막아서고, 국민은 대체 국가의 핵심부에 어떤 인물이 앉아 있는지 ‘스무고개’를 하는 기막힌 상황에 놓여있다. 투명성과 책임이라는 민주주의의 대원칙이 무너지고, ‘그림자 속의 실세’들이 국정을 주무르던 87년 이전, 우리가 익숙했던 바로 그 풍경 그대로다.
안에서 썩기 시작한 것은, 밖에서 반드시 냄새를 풍기는 법이다. 군사정권 시절, 서방 선진국들의 냉대 속에 변방을 전전해야 했던 굴욕적인 외교가 21세기에 반복되고 있다. 안방에서 APEC 정상회의를 개최하면서도 핵심 우방인 트럼프와의 정상회담 일정 하나 잡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국가의 위상이 어디까지 추락했는지를 명백히 보여준다. 올해만 8월까지 330건으로 급증한 납치신고에도 캄보디아 정부가 미온적인 자세로 무시하는 태도는 그래서 놀랍지 않다. 스스로를 존중하지 않는 국가를, 타인이 존중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사진 : 87년 6월 서울의 모습 (연합뉴스)
결국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한 세대가 자신의 역사를 배반하는,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는 자기부정의 드라마다. 민주주의의 투사를 자처했던 그들은, 권력의 단맛에 취해 누구보다 빠르게 과거 독재의 기술을 탐욕스럽게 복제한다. 그들은 87년에 쏘아 올린 화살이, 수십 년을 날아 정확히 자신들의 심장에 명중하는 기이한 광경을 연출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투사를 자처했던 괴물은, 결국 자신이 싸웠던 과거의 괴물을 가장 충실하게 닮아간다.

박주현 칼럼니스트 다른 기사 보기
이 기사에 13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진보주의자라는 게 이런 자들이었나, 아니, 진보를 떠나 인간이 이런 인간들이 있을 수 있나,,, 전과자에 숱한 범죄혐의자를 우두머리로 모시고 알랑방구 뀌며 마음껏 위법을 일삼는 것을 보면, 그리고 인간성도 도덕성도 윤리도 신뢰도 모두 저버렸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들이 캄보디아 중국산 범죄자들과 무슨 차이가 있나 싶다. 혐오와 염증과 환멸이 끝없이 밀려드는 요즘이다.
대한민국 정권 변천사
독재정권 -> 민주정권 -> 범죄정권
이젠 자기입으로 민주화 운동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무조건 거르게 되네요
민주화 운동을 팔던 자들이 민주주의를 짓밟고 있는 현실.
독재자에게 당하고 독재자응 만들고 지지하눈 광주를 봐라. 그들은 아직도 지들이 뭔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를꺼다. 니들이 총으로 사람이 죽는거 봤냐는 말로 스스로 민주주의자라고 생각하잖아. 역겨운 광주
민주주의를 글로만 배웠지 사실 국힘도 더불어당도 독재를 하고 싶어하잖아. 잔인하게 하냐 안 하냐의 차이지
칼을 잡았눈데 눈 앞에 국힘을 적이라고 생각하니 쓸어버려야지. 그 피의 댓가가 지 자식이라도
4050 그 자식들이 받는거지. 자식있는 인간이 이재명을 지지하는 것 자체가 독재로 살아도 아파트값만 올라도 된다는 탐욕의 증거 아니겠어. 민주주의 보다 아파트 값이 떨어지지 않는 이상 이재명은 굳건해 보인다
결국 또 국민들이 피를 흘려야 바로 잡을 기회가 올까요? 무섭습니다 참
87년에 그들이 꿈꾸던 건 뭐였을까요? 지금 변했다 해도 진정성이 있었다면 가끔을 돌아볼 수 있을텐데 말입니다
좋은 기사,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미약하나마 원고료 보냅니다. ^^;
'국가의 퇴행,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는 자기부정의 드라마.'
토씨 하나조차 아니라고 할 수 없는 진실된 사실이기에
넘나 슬프고 애통한 칼럼이네요.
시일야방성대곡의 애끊던 외침이 이런 것이었을까
이정부의 모든 것이 역겨워요. 나라의 미래가 암울해서 참 걱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