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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에 길들여지지 않기.
  • 박주현 칼럼니스트
  • 등록 2025-07-15 01:35:59
  • 수정 2025-08-05 04:07:09

  • 무력감이라는 유리벽을 깨뜨리는 가장 작은 행동.
  • 침묵과 글쓰기 사이에서 발견한 저항의 문법.

<그래픽 :박주현>


어제저녁, 장관 후보자에 대한 칼럼을 쓰다 또다시 "모든 것은 청문회장에서 소상히 밝히겠다"라고 답변했다는 글을 쓰다 키보드에서 손을 떼었다. 이 수없이 반복되는 개미지옥 같은 상황을 또 어떻게 글로 써야 할까.


화면에는 커서만 깜빡이고 있었다. 머릿속에는 쓰고 싶은 이야기들이 넘쳐났다. 그런데 그 모든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는 또 다른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충분히 지쳐 있을 사람들을, 내가 한 번 더 절망의 구덩이로 밀어 넣는 건 아닐까.


아무리 심각한 문제가 제기되어도 결국 같은 패턴이다. 적당히 뭉개고 버티다가, 야당이 제대로 힘을 못 쓰는 틈을 타서 무난하게 통과시킨다. 자료 제출 거부하고, 증인 출석도 거부하고, 나중에는 "내란세력 청산"이라는 단어 하나면 모든 게 정당화된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는 우리는 점점 학습된 무력감에 빠져간다. 애초 대통령부터가 그랬다. 어떤 문제든, 어떤 의혹이든 적당히 뭉개고 버티면 그만이었다. 수사하는 검사를 탄핵하고, 신상을 유포하고, 불리한 판결을 한 판사를 저격하고, 법원 앞엔 근조화환이 쌓여갔다. 법까지 바꿔가며 본인에 대한 수사와 재판은 죄다 중단시키고. 그렇게 기어이 대통령 자리에 앉은 걸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절망감.


'그럼 우리는 뭘 할 수 있는데?'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글쓰기를 머뭇거리게 된다. 이미 충분히 지친 사람들에게 또 다른 절망을 안겨주고 싶지 않다. 차라리 고양이 동영상이나 음식 사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나을까.


하지만 침묵이 답은 아니다. 병든 환자가 "아프다는 소리만 들으면 우울해진다"고 해서 병을 외면할 수는 없다. 우리가 느끼는 무력감의 정체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심리학자 셀리그만의 실험을 보자. 개들에게 반복적으로 피할 수 없는 전기 충격을 가하면, 나중에 충격을 피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개들은 그냥 누워서 당한다. 학습된 무력감이다. 이재명의 등장부터 대통령 취임까지, 우리는 수많은 좌절을 경험했다. 권력은 언제나 시간을 자신의 편으로 만든다. 기다리면 사람들이 지칠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 그 개들과 같은 취급을 당해도 되는 걸까? 이게 바로 무력감에 빠져서 허우적 돼서는 안 되는 이유다. 아니 이왕 개취급 당할 거라면 끝까지 물고 뜯어 '어휴 잘못 건드렸네'라는 후회하게 만드는 들개가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그 한계를 이유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더 큰 문제다. 홍콩에서 한 소년이 한 말이 계속 기억에 남는다. "십 년 후 초등학생들이 홍콩의 민주화를 위해 시위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이것은 우리의 책임이다."


오늘 우리가 행동하지 않으면, 그 부담은 고스란히 다음 세대에게 넘어간다. 우리의 아이들이 또 다른 장관후보에서 "모든 것은 청문회장에서 소상히 밝히겠다"는 답변을 들어야 할까?


물론 쉬운 길이 될 거라 거짓말하진 않겠다. 그래서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서로를 지지하는 것이다.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도 함께하면 가능해진다. 절망에 빠진 사람을 위로하고, 지친 사람을 격려하며, 함께 행동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분노도 절망도 아니다. 필요한 것은 냉정한 분석과 끈질긴 행동이다. 그리고 서로에 대한 믿음이다. 우리는 생각할 수 있고, 행동할 수 있고,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시민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서로에게 빛이 되어주는 것이다. 절망하는 사람에게는 희망을, 지친 사람에게는 위로를, 혼자인 사람에게는 연대를 건네주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어둠 속에서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걸어가고 있다. 이 길이 언제 끝날지는 모른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서로를 포기하지 않는 한, 이 길에도 반드시 출구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출구를 향해 함께 걸어가는 것. 우리가 버텨야 하는 건 이 시기를 두 눈 부릅뜨고 보고, 기록하여 다시는 이런 진흙탕에 들어가지 않도록 알려주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의미 있는 일이다. 그리고 끝으로 정치에 분노는 하시되, 현생에선 마치 영화처럼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그리고 없으면 찾아서라도 "웃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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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 19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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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dongong2025-07-15 16:40:24

    위로가 되는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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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oto91052025-07-15 14:33:38

    좋은글 감사합니다 요즘 같은 때에 너무나 위로가 되는 글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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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uest2025-07-15 13:14:52

    그 인간이 대통령호소인이 된 이후 끝이 없는 분노감,절망감이 일상을 지치게 만드는 요즘 기자님 글에 깊은 공감을 합니다..우리 다음 세대가 지금과 같은 상황에 다다르지 않게 말해줄 수 있도록 포기하지 말고 버텨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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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uest2025-07-15 13:11:58

    좋은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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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inn19712025-07-15 12:41:54

    지치는 날 시원한 소나기로 더위가 잠시나마 식는듯한 글이네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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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uest2025-07-15 11:45:30

    큰 위로가 되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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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uest2025-07-15 11:31:08

    힘든 나날이지만 기자님 같은 분이 계셔서 또 힘을 내봅니다!!언제까지 국민들의 귀와 눈을 막을수 있을지...
    그들이 죗값 받을날을 기다리며 기사 정독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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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uest2025-07-15 11:18:45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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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uest2025-07-15 11:16:41

    좋은글 감사합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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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uest2025-07-15 11:16:17

    선과 정의로운 마음이 모아져 일그러져 가는 한국이 바르게 정립될수 있길 기원합니다. 살인과 악, 잔혹함과 폭력이 뒤엉킨 혼돈의 시국에 어떤 마음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마음의 성찰이 느껴지는 칼럼,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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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uest2025-07-15 11:13:36

    진정 마음속 저 깊은 곳에서 뭉클한 감정과 울림이 느껴지는 글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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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uest2025-07-15 11:03:02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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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ver2025-07-15 10:21:36

    딱 저를 위한 위안과 다시 서게 해 주시는 칼럼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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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uest2025-07-15 09:55:45

    지금처럼 뉴스에 짜증이 난 적이 없었는데...우리의 삶은 계속....엔딩은 봐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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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mlwlsdid2025-07-15 09:32:16

    너무 좋은글이에요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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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inte2025-07-15 09:11:26

    지금 저에게 정말 위로가 되는 글이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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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lsquf242025-07-15 08:54:21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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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uest2025-07-15 08:48:39

    위로와 힘이되는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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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p772025-07-15 08:19:02

    지금 딱 필요한 위로의 글입니다.

아페리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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