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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학으로 보는 이재명 공직선거법 항소심
  • 전승민 기자
  • 등록 2025-03-27 21:03:22


칼럼니스트 전승민


‘말은 곧 행위다’


언어철학자 오스틴은 기존의 관념론적인 언어 인식에서 벗어나 말이라는 것은 곧 실체를 갖는다고 정의했다. 오스틴 이전에 말은 단순히 세계를 진술하는 기능만을 갖는다고 여겼다. 하지만 말은 특정한 행위를 수행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Speech act, 즉 화행이라고 명명했다.


이재명 공직선거법에 대한 쟁점은 크게 세 가지였다. 성남도시공사 처장이었던 고 김문기 씨를 모른다는 것, 백현동 연구원 부지를 용도 변경하는 데 있어 국토부의 협박이 있었다는 것, 호주에 가서 김문기 씨와 찍은 사진이 마치 골프를 찍은 것처럼 조작됐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 발언은 모두 이재명의 입에서 나왔다. 사적인 자리도 아니었고 전 국민이 다 볼 수 있도록 생중계 되는 경선과 국정감사 자리였다. 모두 다 알다시피 지난 3월 26일 항소심 재판부는 이 세 가지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다. 새롭게 드러난 사실 관계가 없었던 데 비해 1심 판결 집행유예 2년 징역 1년형과는 대조적이다.


항소심 재판이 진행되며 피고인 이재명 측은 줄곧 김문기 씨를 모른다는 발언이 행위가 아니라 인식이라고 주장했다. 언어학자를 증인으로 세우려고 했지만 재판부가 이를 허가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재판부가 언어학에 대해 일가견이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재판부의 허가가 나서 법정에 선다면 언어학자는 ‘말은 곧 행위’라는 개념을 내세우지 않았을까. 오스틴의 개념은 현대 언어학의 근간을 이루는 중요한 전환점이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이런 것이다. 창문이 열려 있는 상황에서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바람이 차다’라고 말한다고 치자. 이때 아랫사람이 ‘그러네요’라고 대답하며 멀뚱멀뚱 있다가는 속 없는 사람이 될 것이다. 윗사람 발언의 속뜻에는 ‘바람이 차니까, 창문을 닫으라’ 혹은 유연하게 표현하자면 ‘닫는 게 좋지 않을까?’ 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또 한 가지 상황을 예시로 들어보자. 한 사람이 망치를 들고 상황에서 옆에 서 있는 보조자에게 ‘못’이라고 한 음절 뿐인 발화를 한다고 치자. 이때 보조자는 못을 건네줄 것이다. 언어는 단순히 자모의 합이 아니며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맥락, 상황, 발화자에 따라 똑같은 말이라도 천지차이의 다양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이처럼 말은 행동을 이끌고 주변 상황, 혹은 세상을 변화하는 힘을 갖는다. 행위와 말이 명확하게 분리되지 않기 때문에 화행이라는 합성어가 생겨난 것이다.


이런 화행의 예시는 이재명 대표 부부의 혐의와도 연결지을 수 있다. 경기도청 소속 공무원이었던 배소현 씨는 그의 말에 따르면 이재명 부부가 직접적으로 지시를 하지 않았는데도 자의로 조력하며 소고기와 초밥, 샌드위치, 과일 등을 사서 갖다 바쳤다. 조명현 씨가 공개한 녹취에 따르면 배 씨는 전화통화로 ‘네, 네, 사모님, 알겠습니다’라는 말을 연달아 했다. 자의로 조력했다는 말과 직접적으로 지시하지 않았다는 말을 모두 선의로 받아들여 결론내자면 직접적인 지시가 아닌, 무언가의 화행이 배 씨를 움직이게 한 것이다.


이재명 대표가 김문기 씨를 모른다는 것은 인식의 문제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오감을 통해 정보를 받아들이고 머리 속에서 판단을 내릴 때까지다. 인식에 대한 언명을 발언으로 옮기면 그것은 행위로 봐야 한다. 대장동 사건에 있어 이재명 대표가 김문기 씨를 아는지, 모르는지에 대한 문제는 비리에 관련이 돼 있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이기 때문이다. 


언어의 속성 중에 하나가 사회성이다. 언어를 사용하는 사회 구성원들이 일종의 약속을 통해 의사소통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나 혼자 당장 내일부터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한다면 누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 사회적 약속에 따라 사슴은 사슴으로, 말은 말로 불러야 한다. 권력에 눈이 멀어, 혹은 눈치를 보느라 상식과 사회적 약속은 아랑곳 않고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는 것 같다. 사슴을 사슴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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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ave08242025-03-30 08:19:00

    인식의 문제니 뭐니하며 일반인들이 알아 들을 수 없는 말로 판결문을 쓴다는 건  판사들이 엉터리 판결을 내리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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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32025-03-28 11:17:55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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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uest2025-03-28 08:46:40

    상식이통하는 세상을 살아가고싶어요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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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uest2025-03-28 05:24:24

    좋은 글 잘 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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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uest2025-03-27 22:45:46

    좋은글이네요.어제 판결로 어이없어하는 지인들에게 공유해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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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uest2025-03-27 22:35:29

    맞는 말씀입니다만,
    저들은 이미 무죄로 '답정'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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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uest2025-03-27 22:35:09

    전아나님 방송만 잘하시는줄 알았는데
    글도 참 잘쓰시는군요
    오랜만에 보는 잘 쓰여진 기사를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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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ngkeun22025-03-27 21:35:16

    잘 읽었습니다
    누가 뭐래도 사슴은 사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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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lsquf242025-03-27 21:29:12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이딴 판결엔 논리고 언어학이고 법리고 상식이니....
    증거니, 증인이니, 재판이니....
    그 어떤 것도 소용없었으니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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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uest2025-03-27 21:22:45

    이해하기 쉽게 잘 쓰신 글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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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ik1022025-03-27 21:12:57

    전승민 기자님 근데 프로필 사진 윤소장님 아니신가욬ㅋㅋ
    재치있고 날카로운 기사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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