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EPA 연합뉴스 자료사진]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18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 백악관을 방문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만난다. 주목할 점은 이번 회담에 젤렌스키 대통령과 함께 유럽 주요국 정상들이 대거 동행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알래스카 미·러 정상회담 이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으로 의심되는 트럼프 대통령을 설득하고, 우크라이나의 안보와 유럽의 평화를 위한 공동의 목소리를 내기 위함으로 풀이된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은 17일 자신의 엑스(X·옛 트위터)를 통해 "젤렌스키 대통령의 요청으로 나는 내일 백악관에서 열리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다른 유럽 지도자들과의 회담에 참석할 것"이라고 밝혔다.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의 발표는 젤렌스키 대통령 혼자 트럼프 대통령을 상대할 경우, 지난 2월 백악관 회담에서처럼 공개적인 면박을 당하거나 일방적인 영토 양보를 강요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로이터와 AFP통신에 따르면, 젤렌스키 대통령의 이번 미국 방문에는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 외에도 마르크 뤼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사무총장,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알렉산데르 스투브 핀란드 대통령 등 유럽의 핵심 지도자들이 동행한다. 프랑스 엘리제궁은 성명을 통해 "유럽과 미국의 협조 작업을 통해 우크라이나의 핵심 이익과 유럽의 안보를 보장하는 공정하고 지속 가능한 평화를 달성하는 것을 목표로 할 것"이라며 이번 회담의 목적이 트럼프 행정부와의 공조를 강화하는 데 있음을 명확히 했다.
유럽 지도자들이 이처럼 전례 없이 트럼프 대통령과의 만남에 집단으로 나선 것은, 최근 알래스카에서 열린 미·러 정상회담 결과에 대한 깊은 불신과 위기감 때문으로 분석된다. 해당 회담에서 푸틴 대통령은 트럼프에게 우크라이나가 돈바스에서 철수하면 현재의 전선을 기준으로 휴전하고, 우크라이나나 유럽 국가를 재공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서면으로 하겠다고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러시아가 점령한 영토를 사실상 인정하라는 요구로, 젤렌스키 정부와 유럽 지도자들이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푸틴의 이러한 제안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정황이 포착되면서 유럽은 급박하게 대응책 마련에 나섰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은 알래스카 회담 직후 기자회견에서 "푸틴은 현명하고, 협상할 준비가 되어 있다"며 "젤렌스키가 더 이상 군인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발언해 푸틴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트럼프의 행보는 지난 2014년 크림반도 합병 사태 이후 러시아의 확장을 저지해 온 유럽의 안보 질서를 뿌리부터 흔들 수 있는 위험한 신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따라서 젤렌스키 대통령과 유럽 지도자들의 워싱턴 동행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러시아의 제안이 유럽 전체의 안보를 위협하는 행위임을 설득하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변함없는 지원을 재확인시키기 위한 마지막 시도로 보인다. 이들의 공동 행동은 트럼프 행정부가 푸틴의 요구를 수용할 경우, 우크라이나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가 군사적, 외교적 위기에 처하게 될 것임을 분명히 경고하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한편, 젤렌스키 대통령은 미국으로 향하기 전 벨기에 브뤼셀을 방문해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과 먼저 만났다. 이들은 오후 3시에 영국, 프랑스, 독일 정상이 주도하는 '의지의 연합' 화상 회의에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는 알래스카 정상회담 후 트럼프 대통령을 통해 전해진 푸틴의 제안을 집중적으로 논의하고, 우크라이나의 안보와 유럽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공동 방안을 모색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유럽이 미국의 정책 변화에 일방적으로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며 위기를 관리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번 워싱턴 회담 결과에 따라 향후 우크라이나 전쟁의 향방과 함께 미국과 유럽 동맹 관계의 미래도 중대한 기로에 서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박주현 다른 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