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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이제 스포츠가 되었다
  • 박주현 칼럼니스트
  • 등록 2025-05-09 09:55:23
  • 수정 2025-08-05 04:3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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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치의 수준의 몰락을 이끈 팬덤정치

▲< 그래픽 : 박주현 >


어제 지하철에서 한 중년 남성을 보았다. 그는 스마트폰으로 유튜브를 보고 있었다. 화면에는 이재명이 누군가에게 격렬하게 항의하는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남성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그 미소에는 일종의 만족감이 담겨 있었다. 마치 자신의 자식이 운동회에서 달리기를 하는 것을 지켜보는 부모의 그것과 비슷했다.


4050 세대 남성의 서재를 들여다보자. 책장에는 대학 시절 읽었던 마르크스 전집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놓여있다. 침대 옆 테이블 위에는 스마트폰 거치대가 고정되어 있다. 그는 매일 밤 잠들기 전 유튜브를 본다. 이어폰을 꽂고, 특정 유튜버의 방송을 틀어놓는다. "이재명대표, 아니지 이제 대통령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우리의 바램대로 이재명대표는 당선 9부 능선을 넘었습니다." 그 목소리를 들으며 그는 깊은 안도감을 느낀다. 세상의 복잡한 문제들이 명쾌한 답변으로 정리되는 순간이다. 적과 아군이 명확히 구분되고, 모든 현상에는 단 하나의 원인이 있다. 그런 단순함이 주는 안정감은 처방전 없이도 구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면제다.


지난달 한 카페에서 일때문에 만난 그룹중에 이재명 지지자가 있었다. 50대 초반의 여성이었다.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그녀는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며 이재명의 매력에 대해 설명했다.


"이재명은 강하니까요. 욕을 먹어도 물러서지 않잖아요."


그녀가 '강하다'는 단어를 말할 때 눈빛이 변했다. 마치 오래된 연애 편지를 다시 읽는 사람처럼 먼 곳을 바라보았다. 이재명의 강인함에 대한 갈망. 그것이 핵심인지도 모른다.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일상에서 확신에 찬 목소리는 드물다. 이재명은 어떤 질문에도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불가능한 약속도 서슴없이 한다. 다른 정치인들이 "검토하겠습니다"라고 말할 때, 그는 "해결하겠습니다"라고 단언한다. 사람들은 그런 단언에 안도한다. 복잡한 문제가 단순해지는 착각을 느낀다. 나의 시각에선 실현 가능성 없고 퍼주기뿐인 대책없는 뻔뻔함이 그들에겐 강인함으로 둔갑한다.


재미있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를 '개딸'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이다. 딸이라는 표현에는 무엇이 담겨 있을까. 보호받고 싶은 욕구일까, 아니면 강한 아버지 상에 대한 갈망일까. 정치와 가족의 경계가 흐려지는 지점이다.


과거 운동권 문화의 그림자도 보인다. 80년대 학생 운동의 전투적 언어와 행동 양식이 지금의 정치 팬덤에 유전자처럼 남아있다. 당시 그들의 선배들은 독재에 맞서 싸웠다. 그 선배들에 대한 부채의식과 동경어린 눈빛을 기억하며 그들을 이어 지금도 싸우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적이 바뀌었을 뿐이다. 그들의 언어는 여전히 "투쟁"과 "척결"로 가득하다.


민주화 이후 40년이 흘렀지만, 그 시절의 감정 구조는 여전히 살아있다. 이것은 일종의 시간 지체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몸은 21세기에 살지만, 감정은 80년대에 멈춰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측면은 권력에 대한 욕망이다. 김어준같은 유튜버들이 제공하는 것은 다름 아닌 권력감이다. '우리'의 목소리가 정치인의 운명을 좌지우지한다는 느낌, 그 쾌감은 어디서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팬덤은 단순한 지지를 넘어 권력 행사의 대리 경험을 제공한다.


4050 세대의 독서율은 급격히 하락했다. 성인 전체 독서율은 2017년 62.3%에서 2021년 47.5%로 불과 4년 사이에 14.8%p나 하락했는데, 40대에서 –14.4%p, 50대에서 –17.5%p, 60대에서 –24.3%p를 기록하며 연령이 많을수록 '폭락' 수준으로 줄어드는 독서 지형도를 보여준다. 이 결과가 보여주는 건 책이 제공하는 복잡성과 다양한 관점 대신 자신의 생각을 확인해주는 콘텐츠만 선택적으로 소비한다는 뜻이다. 검색은 하지만 조사하지는 않는다. 결론이 먼저 있고, 그것을 뒷받침할 증거만 찾는다. 이런 확증 편향은 디지털 시대에 더욱 심화된다.


그들의 이중성도 눈에 띈다. 반미를 외치면서 자녀는 미국 유학을 보내고, 반일을 말하면서 주말에는 일본 여행을 즐긴다. 그들은 기득권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자신을 약자라고 여긴다. 이념과 현실 사이의 이 괴리는 어쩌면 가장 한국적인 특성인지도 모른다.


심리학자들은 정치적 팬덤을 일종의 종교 현상으로 본다. 절대적 신뢰, 의심의 부재, 비판에 대한 즉각적인 방어 반응은 종교적 신앙과 유사하다. 그리고 어쩌면 인간에게는 그런 확신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복잡한 세상에서 단순한 답을 주는 신앙은 편안함을 준다.


중요한 것은 이런 현상이 특정 정치 진영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팬덤 정치는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는다. 다만 각자가 다른 우상을 섬길 뿐이다. 그리고 이 현상은 민주주의의 미래에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합리적 토론과 타협보다 충성과 열광이 지배하는 정치 문화는 어디로 향할 것인가.


이재명 지지자는 이렇게 말했다. "비판적으로 생각하라고요?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어요. 이미 답은 정해져 있으니까." 그들의 눈에는 확신이 빛났지만 나에겐 그것이 오히려 두렵다. 맹신만큼 위험한 감정도 없는 것이고 의심이야말로 민주주의의 토대라는 것을 기억하니까.


계엄사태가 있기 몇달 전, 열렬한 이재명 지지자인 친구와 함께 술을 마셨다. 피하고 싶던 정치 이야기가 시작됐고, 예상대로 격렬한 논쟁으로 이어졌다. 그러다 문득 그의 손이 떨리는 것을 보았다. 그는 이재명을 비판하는 나의 말에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가족을 모욕당한 것처럼.


집으로 돌아오는 길, 생각했다. 누가 그를 비난할 수 있을까. 불확실한 세상에서 확실한 답을 찾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누구나 어둠 속에서는 빛을 찾게 마련이다. 그것이 이재명이든, 다른 누구든.


다음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문자가 와 있었다. 그 친구였다. "미안하다. 내가 너무 흥분했어."

답장을 보냈다. "괜찮아. 다음에는 정치 이야기 말고 야구얘기나 하자."


그가 바로 답장을 보냈다. "응. 근데 두산이 롯데보다 확실히 나은 팀이라는 건 인정하지?"


웃음이 나오면서 문득 깨달았다. 우리나라에선 정치가 변했구나. 이유와 논리가 아닌 그냥 자기팀이라 인식하고 무조건적인 지지와 응원을 남기는 스포츠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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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 5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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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uest2025-05-09 21:09:44

    이낙연이 유일한 희망이다
    이낙연 나오면 무조건 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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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uest2025-05-09 16:38:01

    양극단은 정치가 스포츠화 됐다는 말에 깊이 공감.. 중도가 더 깨어있길 바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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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uest2025-05-09 12:02:57

    스포츠가 됐다는 말이 딱 알맞는 것 같네요. 윤어게인 외치며 김문수를 고집하는 쪽도 결국 동일한 것 같습니다. 이미 양극단으로 벌어지고 스포츠화 됐는데 타파할 길은 있는지 암담하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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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uest2025-05-09 11:13:41

    이재명에 동조내지는 묵인하는 문재인을 보며 맹렬히 반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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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erbteap2025-05-09 10:08:57

    독재 타도를 외치던 그들이 좌파독재를 획책하는 걸 보면서 독재라서 반대했던 게 아니고 우리편이 하는 게 아니어서 반대했던 거구나 싶어 씁쓸합니다. 이를 꾸짖는 진보진영 어른이 없고 유일하게 옳은 목소리를 내는 이낙연만 세상 몹쓸 사람 취급하는 거 보니 쟤네들도 희망이 없구나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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