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인생
“행복은 평범함 속에서 살아가는 예술이다.” 체호프, 벚꽃 동산
내일에 대한 걱정 없이 저녁을 맞이하는 것. 행복을 내 식대로 해석해봤어. 겨우 한 줄이지만 정말 어려운 일이야. 과연 살면서 이런 행복을 충만하게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결코 많지는 않을 거야. 많다면 이런 단어가 이렇게 귀하게 쓰일 리 없을 테니까.
행복은
내가 인생의 어느 지점에 있느냐에 따라 달라질 거야. 내가 초등학교, 옛말로 국민학교를 다닐 때는 단연코 토요일 저녁이 제일 행복했어. 다음 날이 일요일이라 학교에 가지 않았거든. 딱히 학교를 싫어했던 것이 아니라 무언가 큰 짐 같은 부담이 되는 것이 싫었던 거야.
독일어 속담에 "Ein Klotz am Bein haben."(다리에 통나무가 묶여 있다)라는 말이 있는데, 유독 일요일 밤이 되면 부모님이 내일 학교 갈 채비를 하라는 말을 해도 두 다리가 묶인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못 들은 척하곤 했지.
성인이 되어서 공사 현장에서 일을 한 적이 있었는데, 아주 높지는 않았지만 점차 건물이 모습을 갖춰가는 것을 보며 행복하다고 느꼈어. 내 건물도 아닌데 말이지. 내가 흘린 땀이 거친 돌덩이를 부수고 골라내며 부드러운 삶의 터전으로 바뀌고, 나와 동료들, 그리고 중장비가 함께, 즉 인간과 기계가 함께 목적을 가지고 ‘건물’이라는 의지를 세상에 세우는 것. 그렇게 올라간 건물이 태양을 가리고 그늘을 만들어낼 때 약간의 경외감도 느꼈어.
영국 산업혁명 때도 공장 굴뚝에서 나오는 매연이 하늘을 가리는 것을 보며 찬양하는 시를 쓴 시인들도 있다고 하잖아. 그렇게 몇 번의 경외감을 느끼며 번 돈으로 중고 모터사이클을 샀을 때 정말 행복했지. 본래 있던 열쇠는 전 주인이 잃어버리고 동네 열쇠집에서 맞춘 듯 허름하고 귀퉁이가 맞지 않아 제대로 키박스에도 들어가지 않는 중고 모터사이클. 좌측, 우측 가리지 않고 삭삭 쓰러지고 제짝 순정 부품이 아닌 대체품을 끼워 넣어 마치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화이트 와인과 압생트에 불콰해져 조립순서를 까먹고 만든 괴인 같기도 했어.
태양이 서쪽으로 완전히 넘어가고, 하늘이 어두운 파란빛에서 검정으로 바뀐 후 좁은 골목길에 위태롭게 세워져 있는 모습은 모진 해풍에 나뭇가지마저 잃어버린 늙은 소나무처럼 보이기도 했지. 하지만 오른손으로 스로틀을 감을 때마다 머플러 소리와 함께 전진하는 그 모터사이클을 타고 국도를 따라 달릴 때 너무 행복했어. 단기통 12마력 엔진이 만들어내는 특별한 경험이었지.
특히 언제나 동쪽으로. 역시 태양을 따라 종주하는 습성이 그때부터 나에게 있었나 봐. 아주 가끔은 나와 염색체가 다른 사람을 뒷자리에 태울 때도 있었지. 자동차는 좌우 가로로 탑승하지만 모터사이클은 앞뒤 세로로 앉게 되지. 내 머리가 생각하는 대로 앞바퀴로 방향을 잡고, 내 오른손이 움직이는 대로 엔진 출력을 조정해 속도를 높이고, 텐덤 시트에 탄 여인은 그저 나를 따르기만 할 뿐. 그리고 아직은 딴딴했던 내 배와 허리를 꽉 잡고 있던 그 손.
그 옛날 KBS 명화극장에서 봤던 마리안느 페이스풀과 알랭 들롱의 영화 *그대 품에 다시 한번(The Girl on A Motorcycle)*을 떠올리며, 별다른 맥락 없는 외로움에 빠졌다가 유덕화와 오천련의 *천장지구(天若有情)*의 경험한 적 없는 애틋함을 헬멧을 쓰고 상상하곤 했어.
이렇게 행복에 대해 글을 쓰다 보니 잊혔던 시간들의 그림자를 다시 떠올렸고, 그 그림자들이 지금의 나와 춤을 추는 것이 내 사고에 다시 영향을 끼쳤나 봐. 행복에 한 줄 더 추가해야 할 것 같아. ‘노력에 대한 보상’이 제대로 이루어진 상황이지. 공사 현장 노동일은 힘들었지만 그에 따른 급여가 나왔고, 그 급여는 다시 중고 모터사이클로 연결됐지.
모터사이클을 타면서 느꼈던 삶에 대한 만족감은 다시 내일 공사 현장으로 발을 옮기는데 살짝 등을 밀고 손을 잡아끄는 역할을 해줬어. 몸으로 느꼈던 모터사이클을 머리로도 이해해보고 싶어서 일본어로 된 모터사이클 잡지를 샀지. 일본어를 모르니 당연히 읽을 수 없었어.
모국어 이외의 언어를 가장 빨리 습득하는 방법은 그 언어가 모국어인 나라로 가는 것이지만 형편상 그렇게 할 수 없었고, 난 내 주변을 ‘일본’으로 셋팅했어. 학원에서 수업 두 개를 오전반, 저녁반으로 일부러 나누어 수강하며, 중간에 비는 시간에는 학원 로비 책상에서 자율학습을 했지. 말하고, 읽고, 쓰고, 듣게 되었을 때 무엇보다 시신경으로 글자의 형상을 뇌에 집어넣으면서도 측두엽과 해마를 비켜가며 폐기처분되었던 일본 글자들이 비로소 ‘지식’으로 활용될 때 엄청난 행복감을 느꼈지.
경기도 평택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남부터미널역에서 지하철 3호선을 탄 후, 교대역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고 강남역에서 하차한 뒤 300여 미터를 걷는 일정은 결코 만만치 않은 여정이었어. 하지만 카와사키 GPZ900R(영화 탑건 1986에서 주인공 톰 크루즈가 탔던 바이크)에 대한 기사를 읽으며 다음 날 버스터미널로 기분 좋게 갈 수 있었지.
행복의 역어는 뭘까? 불행이 아니라 불안 아닐까. 어떤 충만한 감정으로 대지에 단단히 서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볼 수 있는 자신감이 가득 찬 것이 행복이라면, 몰려오는 태풍에 방향을 잃을까 걱정스러운 마음에 나침반 바늘이 부서져라 쳐다보지만 깊은 수면 아래의 암초를 두려워하는 것이 불안 아닐까. 그래서 행복의 반대말은 불안일 거야.
인간의 마음이란 적정 수준의 타협 없이 오직 0과 1의 이진법으로만 삶을 유지하는 존재일지도 몰라. 행복하면서 불안한 척하기도 하고, 불안하면서도 행복한 척하지. 특히 소셜 미디어를 보면 구독자를 늘리거나 조회수를 늘리기 위해 스스로의 감정과 형편을 배신하며 타인을 속이거나 스스로를 속이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아.
행복을 누리거나 불안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더 최악이라고 생각해. 행복하지 않다면 불안해도 좋아. 불안하다면 그 원인을 찾아서 하나씩 해결하면 되니까. 그리고 완전히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그 과정에 의미가 있으니까.
내가 벽돌을 날라가며 지었던 건물은 내 것이 아니었고, 그 일을 하며 받았던 돈으로 샀던 12마력 모터사이클은 결코 전문지 표지를 장식할 매끈한 상태는 아니었지. 일본어도 밤낮으로 매진했지만 탁월하다고 할 수준은 아니야.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불안을 잊을 수 있었어. 아니, 불안을 없앨 수 있었지.
노동과 학습이라는 가장 고도화된 행위를 통해서 말이야. 그리고 이때 느꼈던 행복이란 단어는 나에게 불길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숯처럼 남았어.
불안해? 잘 됐다. 이제 행복해지기 위한 노력을 하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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