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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후 지정" - 네 글자에 갇힌 민주주의
  • 박주현 칼럼니스트
  • 등록 2025-06-09 16:00:35
  • 수정 2025-08-05 04: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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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정에서 일어난 항복 선언
  • 서울고등법원이 스스로 포기한 것들

<그래픽 : 박주현>


사법부가 스스로 무릎 꿇은 날


2025년 6월 9일, 서울고등법원 형사7부 재판장이 마이크 앞에 섰다. "6월 18일로 예정된 기일을 추후 지정합니다." 단 한 문장. 그것으로 끝이었다. 법정을 나서는 취재진들의 발걸음이 복도에 메아리쳤다. 뒤따르는 것은 침묵뿐이었다. 망치소리도, 증인 선서도, 변론도 없는 법정. 그날 우리가 목격한 것은 재판이 아니라 항복 선언이었다.


64%의 목소리가 묻힌 법정


KBS 앵커가 뉴스를 읽는다. "유권자의 64%가 재판 지속을 원한다고 답했습니다." 화면 속 그래프가 선명하다. 더불어민주당 지지자들도 절반 가까이가 '재판을 계속하라'고 말했다. 이는 여야를 떠난 목소리였다. 법 앞의 평등이라는, 초등학생도 아는 상식에 대한 국민적 신뢰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서울고등법원은 이 목소리를 법정 밖으로 밀어냈다. 헌법 84조라는 두꺼운 벽 뒤로 말이다.


헌법 84조. "대통령은 내란 또는 외환의 죄를 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재직 중 형사상의 소추를 받지 아니한다." 법조문 한 줄이 이렇게 무거울 줄 누가 알았을까. 이 조항을 만든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대통령이 국정에 전념하도록 하겠다는 취지였을 것이다. 선의였다. 하지만 선의가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권력자의 방패막이가 되기도 한다.


트럼프 카드의 잘못된 사용법


박지원 의원이 카드를 한 장 내놨다. "미국 검찰이 트럼프 대통령 당선 직후 기소를 취소했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그럴듯해 보이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카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짜였다.


미국 검찰이 취소한 것은 연방 차원의 기소였다. 하지만 뉴욕주에서 진행된 트럼프의 형사재판은 어떻게 됐는가? 유죄 판결까지 나왔다. 다른 주에서도 재판이 계속되고 있다. 


더 중요한 것은 미국과 우리의 시스템이 다르다는 점이다. 미국은 연방제 국가로 연방과 주 정부가 각각 독립적 사법권을 가진다. 우리는 단일 사법 체계다. 애초에 비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잘못된 비교로 국민을 속이려 하지 말라. 진실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법복 안의 균열


법원 내부망 코트넷이 들끓고 있다. 어떤 법관은 키보드를 두드린다. "사법부의 정치적 중립성에 대한 해명할 수 없는 의심에 대해 대법원장은 책임져야 한다."


다른 법관이 반박한다. "법관에 대한 탄핵, 국정조사를 언급하는 것 자체에 단호히 반대한다."


같은 법복을 입고도 생각이 다르다. 이는 사법부 내부의 깊은 분열을 보여준다. 천대엽 법원행정처장의 발언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리라. "사법부 독립을 과거 어두웠던 시절에도 지켜왔다"는 그의 말에는 현재 상황에 대한 우려가 묻어 있다.


하지만 여기서 질문해야 한다. 사법부 독립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말이다. 법관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국민을 위한 것인가? 답은 명확하다. 진정한 사법부 독립은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법과 원칙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다.


삼권분립의 마지막 다리


이재명 대통령은 지금 입법부와 행정부를 모두 장악하고 있다. 국회는 그의 손 안에 있고, 청와대도 마찬가지다. 여기에 사법부마저 스스로 무릎을 꿇는다면 어떻게 될까?


삼권분립이라는 민주주의의 삼각대가 무너진다. 세 개의 다리 중 두 개가 이미 한 사람에게 속해 있는 상황에서, 마지막 다리마저 기울어진다면 전체 구조가 붕괴한다.


사실 이런 결과를 대통령 당선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했었다. 권력의 집중이 가져올 위험성을 말이다. 하지만 헛기침조차 나오지 않았는데 사법부가 스스로 무릎을 꿇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을 보니, 정말 독재의 첫발을 내딛는 것 같아 두렵다. 역사에서 배운 교훈들이 하나씩 현실이 되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느끼는 공포감은 결코 가볍지 않다.


이번 사태가 우리에게 던지는 교훈은 명확하다. 헌법 조문만으로는 민주주의를 지킬 수 없다. 그것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사람들의 의지와 양심이 더 중요하다.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에서


사법부를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라고 부른다. 입법부와 행정부가 실패할 때 국민의 권리를 지키는 최후의 방어선. 그런데 그 보루가 성문을 스스로 열어젖히고 있다.


유권자 64%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권력자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모습. 이것이 우리가 꿈꿔온 사법부의 모습인가?


이재명 대통령의 재임 기간 동안 계류 중인 5건의 재판이 모두 연기된다면, 이는 대한민국 사법사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길 것이다. 그 상처는 외부의 압력이 아니라 사법부 스스로가 만든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아프다.


2025년 6월 9일. 서울고등법원 형사7부 재판장이 마이크 앞에서 말했던 그 한 문장이 계속 귀에 맴돈다. 


"추후 지정합니다."


그때 함께 묻힌 것은 재판 일정만이 아니었다. 법 앞의 평등이라는 헌법 정신, 국민의 신뢰, 그리고 사법부의 권위까지. 그 모든 것이 판사의 몇마디와 함께 땅 속 깊이 파묻혔다. 


사법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는 헌법 정신을 되새기고, 법과 원칙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사법부 독립이고, 민주주의를 지키는 길이다.


독일의 바이마르가 그랬듯, 터기와 헝가리 그리고 인도처럼 국민이 스스로 민주주의 붕괴에 한 표를 행사한 결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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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 5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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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uest2025-06-10 00:17:59

    기운 빠지는 소리 안 하는 게 좋다는 걸 알지만... 점점 암담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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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uest2025-06-09 20:08:25

    삼권분립을 사법부 스스로 버린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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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uest2025-06-09 17:43:19

    모두 공감합니다. 사법부가 스스로 무릅을 꿁는 참담한 현실에 화가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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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uest2025-06-09 16:47:50

    원외 똥파리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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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lsquf242025-06-09 16:42:45

    누가 '국민은 현명하다'ㄱ 말한 걸까?
    국민은 어리석고, 그 어리석은 국민이 떼로는 잔혹하기까지 한 것 같다.

아페리레
웰컴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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