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기 내각을 구성한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와 대신들. (사진: 일본정부 홈페이지)
26년 동안 자민당의 파트너였던 공명당의 연정파기로 위기에 몰렸던 다카이치 사나에가 우여곡절 끝에 일본 첫 여성 총리가 됐다. 유신회와의 새로운 연정으로 ‘극우보수’ 색채가 강해질 것이라는 우려와 여러 파벌의 이해관계, 과거의 문제들(자민당 정치자금 문제 등) 을 짊어지고 출발하는 다카이치 총리는 일단은 70%라는 높은 지지율 성적표를 받고 아세안회의에 참석 중이다.
다카이치 총리는 내각 구성에서 ‘여남동수’를 공언해 기대를 모았지만 실제로는 18명 중 두 명의 장관을 임명하는데 그쳤다. 겉보기엔 공약 불이행처럼 보인다. ‘역시 극우’ 라거나 ‘그럴 줄 알았다’ 는 냉소가 여기저기서 보인다. 다카이치 총리 당선에 기대를 표했던 국내의 소수정당을 비난하는 의견도 들린다. 그러나 일본 정치 구조를 들여다보면 단번에 여남동수 내각을 꾸리는 건 애초에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한국도 그렇듯 일본도 ‘정치=남성의 일’ 이라는 인식이 아직 강하며 일본 정치의 주류는 세습 정치인이 주도하고 있다. 정치 파벌도 남성 원로들로 채워져 있다. 정치 명문가의 자손들인 전직 총리들이 여전히 의원직을 유지하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전 총리의 아들 고이즈미 신지로, 고노 요헤이 전 장관의 아들 고노 다로,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의 외손자 아베 신조, 요시다 시게루 전 총리의 외손자인 아소 다로 등 당장 생각나는 이름이 이 정도니, 일본 내 세습 정치인들의 비율과 영향력은 훨씬 어마어마하다. 남성위주에 족벌주의까지 만연한 이런 환경에서 여성 정치인은 의회에 들어간다 해도 장관급 인사로 성장하기가 매우 어렵다.
결정적인 문제는 여당인 자민당 내 여성 의원 비율이 10% 남짓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연정 파트너인 유신회는 여성리더는 고사하고 장관직을 맡을 정도의 인물 자체가 없어 애초에 내각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장관을 할 만한 경력 있는 의원들이 대부분 남성들이니, 다카이치가 공약했던 '노르딕(북유럽)' 식의 성평등 내각까지는 갈 길이 멀어도 너무 멀다. 이런 현실에서 다카이치 사나에가 비세습 정치인으로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된 것은 새삼 대단한 일이다.
총리로 선출된 뒤 의회에서 인사하는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 일본 역사상 최초의 여성총리다. (사진: 일본정부 홈페이지)
관행의 문제도 있다. 일본 헌법은 ‘내각의 과반수만 국회의원이면 된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장관직은 대부분 현역 의원이 맡아왔다. 일본 정치에서 내각 구성이란 당내 파벌에 대한 배려이며 총재선에서 지지해준 이들에 대한 정치적 보은 인사의 성격이 강하다. 일본 정계는 국회의원이 아닌 장관이 국회에 출석해 의원들의 질의에 답하는 모습을 잘 받아들이지 않는다. 90년대에 하시모토 류타로 1기 내각에서 국회의원이 아닌 인사를 법무장관으로 기용한 것은 아주 이례적인 일로 받아들여졌으며 이후에는 ‘장관=국회의원’ 관행이 공식처럼 지켜져 왔다.
또한, 일본은 장관직을 맡는 인사의 전문성 보다는 계파나 정당 안에서의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 전체 인사의 '모양새' 가 균형있게 보이는데 도움이 되는지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과거 2개 내각에서 환경대신을 지냈고 직전에 농림상이었던 고이즈미 신지로가 이번 다카이치 내각에서는 방위대신이 된 것만 봐도 그렇다. 일본에서는 영향력 있는 의원이 수십년에 걸쳐 여러 부처의 장관을 역임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역시 여성 정치인이 이 사다리를 타기는 역시 어렵다.
그럼에도 다카이치 총리가 1기 내각에서 여성 의원 두 명을 재무대신과 경제안보장관에 임명한 것은 의미가 있다. 카타야마 사츠키 의원은 이번 내각에서 일본 최초의 여성 재무대신으로 임명됐다. 국가의 예산, 조세, 금융 정책을 총괄하게 된다. 경제안보장관에 임명된 오노다 기미도 화제다. 반도체, 인공지능, 우주산업, 정보정책 등 미래 전략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됐다.
재무와 경제안보 두 부처는 일본 정부 내의 핵심 부처다. 이전 이시바 내각에서 여성 장관들이 교육, 문화, 아동, 여성 분야 장관직에 머물렀던 것과는 대조된다. 다카이치 총리는 1기 내각에 여성 리더들을 ‘위상 높은 자리’에 임명했다는 점에서, 현실적으로 어려운 숫자 맞추기가 아닌 실질적 권한 부여를 통해 여남동수 내각에 가까이 가려 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재명 대통령의 국무회의 모습. (사진: 연합뉴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가. 한국은 일본처럼 장관직에 현역 의원 중심 인사를 임명해야 한다는 관행적 제약은 없다. 인사권자가 마음만 먹는다면 학자, 관료, 기업인, 시민사회 출신 등 다양한 인재를 장관으로 기용할 수 있으며 지금껏 그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 장관 비율은 여전히 낮다. 문재인정부 때 잠시 30%를 넘겼던 여성장관 비율은 윤석열정부와 현정부에 들어 계속 떨어지고 있다. 그 결과 현재 내각에서 여성 장관은 보건복지부와 역할이 크게 조정된 성평등가족부(구 여성가족부)와 농림축산식품부 세 명에 그치고 있다. 그나마도 농림부 장관은 이전 정부에서 임명된 인사를 유지하고 있다.
무슨 핑계를 댈 것인가? 일본처럼 관행적인 제약이 있어서? 정치 계파(파벌) 의 반발 때문에? 그도 아니면 아무리 찾아도 장관을 만한 여성 인재풀이 없다고 할텐가? 공공기관 채용이나 교직, 고시에서의 여성합격률을 예로 들며 '남성역차별'을 주장하면서? 일본 중의원 여성 비율은 15.7%이며 한국 국회의 여성의원 비율은 22대 국회 기준 20%다.
한국 정치에서 여성의 자리가 좁아지는 현실은 여전히 정치·관료 엘리트들의 남성중심적 구조와 문화적 편견 탓이다. 그리고 실천 의지의 문제다. 일본은 구조의 벽에, 한국은 의지의 벽에 가로막혀 있다. 내각의 여성 장관 숫자는 한국과 일본 모두 적지만 그들이 가는 길은 너무도 다르게 보인다.

김선 논설위원 다른 기사 보기
이 기사에 5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리짜이밍 재판했던 주요 변호사들 중 여자가 없어서 그런 것 같음
양성평등 내각 한다던 문재인 정부도 겨우 203-30%의 여성이었던 걸 생각하면 우리나라는 여성 정책이 후퇴하는 반면 일본은 한 발 내딛는 정도가 아니라 내용면에서 큰 폭의 진전이란 점을 높게 평가합니다
역시 여성 리더가 많이 나와야 하는 이유죠
우리는 아직도 여성을 악세사리 정도로만
일본은 힘있는 자리에 여성 장관을 임명했군요. 반면에 우리는..
오랜만에 올려주신 글 잘 읽었습니다.
아 저기도 어쩔 수 없구나 선거용인가 했더니 나름 진전이 있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