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국뽕
  • 윤갑희 기자
  • 등록 2025-09-19 17:28:49
  • 수정 2025-09-19 17:46:22

사막에서 찾은 오아시스, 그리고 다시 신기루 속으로


‘국뽕’이라는 단어조차 존재하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1980년대, 나의 초등학교 시절은 국가적 자부심을 강요당했지만, 정작 그 실체는 모호했던 회색빛 시대였다. 국정교과서는 끊임없이 우리가 위대하다고 가스라이팅했지만, 어린 마음에도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우리가 자랑스러워해야 할 것들은 대개 형이상학적이거나 시대착오적인 것들이었다. ‘순혈민족’. 피가 섞이지 않은 것이 대체 어떤 경쟁력이란 말인가? ‘백의민족’. 옷이 하얀 것이 뭐가 그리 자랑인가? ‘조용한 아침의 나라’. 존재감 없다는 말을 아름답게 포장한 것에 불과했다. 버선코와 처마의 곡선미가 아름답다고 배웠지만, 그것이 우리의 삶과 무슨 상관이 있었을까. 가장 싫었던 것은 ‘한 번도 다른 나라를 침략하지 않은 평화 애호 민족’이라는 레퍼토리였다. 힘이 없어 얻어맞기만 했던 역사를 정신 승리로 포장하는 비겁함이 느껴졌다. 첨단 무기 시대에 ‘활 잘 쏘는 동이족’ 타령은 또 어땠는가.

그 시절의 국뽕은 사막에서 바늘 찾기였다. 그나마 손에 잡히는 유일한 성과는 매년 국제기능올림픽대회 종합 우승 소식이었다. 잠시나마 어깨가 으쓱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이 국가의 격을 대변하는 핵심 지표는 아니었다. 자랑거리가 얼마나 없었으면, 우리의 유일한 비교 우위가 ‘북한보다 잘 산다’는 것이었을까. 그것은 자부심이라기보다 안도감에 가까웠다.


국뽕 톤으로 생성한 AI이미지 (가피우스)

메말랐던 국뽕의 대지에 단비가 내린 것은 2002년이었다. 월드컵 4강 신화는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집단적 효능감을 처음으로 일깨웠다. 때맞춰 아시아 일부 지역에서 한류 열풍이 매니악하게나마 불기 시작했고,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해외 반응을 번역하며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하지만 2000년대의 국뽕은 여전히 어설프고 억지스러운 면이 강했다. “한국은 밤길이 안전하다”, “카페에 물건을 두고 가도 아무도 훔쳐가지 않는다”, “국민성이 친절하다” 등, 소소한 장점들을 과대 포장했다. 이는 여전히 우리가 세계 무대에서 주변부라는 불안감의 방증이었다. 오죽하면 “두 유 노우 김치?”, “두 유 노우 싸이?” 같은, 상대의 인정을 구걸하는 듯한 ‘두유노 밈’이 유행했을까. 그것은 자신감보다는 인정 욕구에 가까웠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억지가 아닌 실력으로 증명하는 시대에 도달했다. BTS의 등장은 새로운 국뽕의 제국을 열었다. 빌보드 차트를 점령한 K팝, 오스카와 칸을 휩쓴 영화, 넷플릭스를 장악한 드라마, 세계인들이 탐독하는 웹툰까지. 문화 콘텐츠뿐만이 아니었다. 반도체와 배터리 등 첨단 산업 분야에서의 독보적인 위치, K-방산의 급부상까지, 한국이 내세울 국뽕 포인트는 차고 넘쳤다.


특히 2025년 현재, 전 세계를 강타한 '케이팝 데몬 헌터스(K-Pop Demon Hunters)'의 열풍은 국뽕의 정점을 찍었다. 건국 이래 최고의 한류 열풍이라는 말이 과장이 아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두 유 노우”를 묻지 않는다. 세계가 먼저 한국을 찾고 배우려 한다. 길고 길었던 문화적 사대주의가 종식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역사는 아이러니하다. 국뽕이 최대치에 도달한 2025년은, 어쩌면 국뽕이 저물기 시작한 해로 기록될지도 모른다. 우리가 이룩한 눈부신 성과는 자유와 창의, 그리고 개방성에 기반한 민주주의의 토양 위에서 피어난 꽃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토양이 급속도로 황폐해지고 있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질식하고 있다. 민주당과 정부의 노골적인 사법부 장악 시도는 삼권분립의 근간을 흔들고 있으며, 극단적인 진영 논리에 매몰된 정치는 사회의 활력을 앗아가고 있다. 비판적 사고가 거세되고, 획일적인 사고가 강요되는 사회에서 창의적인 문화 콘텐츠가 계속 나올 수 있을까?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지정학적 위기다. 국제 사회의 보편적 가치 대신, 친중·반미 경향을 노골화하며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고 있다. 우리가 누려온 번영의 근간이었던 자유 무역 질서와 동맹 관계를 스스로 훼손하는 모습은 위태롭다. 경제적 불확실성이 커지고 사회 갈등이 증폭되면서, 우리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했던 성과들은 기반부터 흔들리고 있다.


우리는 메마른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아냈고, 마침내 그곳을 풍요로운 도시로 일구어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스스로 그 도시의 수원(水源)을 오염시키고 성벽을 허물고 있다. 밖에서 보면 여전히 화려하지만, 안에서는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이다. 국뽕의 정점에서 마주한 이 불안한 예감은, 단순한 기우일까, 아니면 다가올 현실일까.

TAG

프로필이미지

윤갑희 기자 다른 기사 보기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로그인

댓글 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이 기사에 4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 프로필이미지
    guest2025-09-19 21:34:58

    공감하는 한편 착잡하네요.

    더보기
    • 삭제
  • 프로필이미지
    guest2025-09-19 20:29:54

    너무 공감되는 글이라 마음이 씁쓸합니다

    더보기
    • 삭제
  • 프로필이미지
    guest2025-09-19 19:35:23

    무너지기 전에 멈추게 해야 하는데 걱정이 많아지네요

    더보기
    • 삭제
  • 프로필이미지
    guest2025-09-19 18:37:40

    지금의 세상을 바르게 보는 언론 소중합니다 기우나 타협 가능한 영역이 아니에요

    더보기
    • 삭제
아페리레
웰컴퓨터
많이 본 뉴스더보기
  1. [분석] 론스타 4천억 승소 역겨운 광팔이 민주당... 3년 전에는? 2025년 11월 19일한국 정치의 고질병인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식 태도가 13년을 끌어온 론스타 국제투자분쟁(ISDS) 승소 국면에서도 여지없이 반복되고 있다. 3년 전, 법무부가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할 당시 "이길 확률이 전무하다"며 결사반대했던 정치 세력이, 막상 '전부 승소'라는 극적인 결과가 나오자 정.
  2. 썩어가는 것과 익어가는 것의 차이 가을 숲을 걷다 보면 바닥에 떨어진 낙엽들 사이로 오묘한 냄새가 난다. 개중에는 잘 마르고 발효되어 흙으로 돌아가는 그윽한 향기가 있는가 하면, 물기를 머금은 채 질척하게 썩어가는 쿰쿰한 악취도 있다. 인간의 나이 듦도 이와 다르지 않다. 시간은 공평하게 흐르지만, 그 시간이 인간이라는 그릇에 담길 때는 전혀 다른 화학 작용을 일.
  3. 대통령의 '무지(無知)'가 국가 안보의 최대 위협이다 국가 지도자의 말은 그 자체로 전략이자 메시지다. 적대국과 총구를 맞대고 있는 분단국가의 대통령이 공개석상에서 내뱉는 안보 관련 발언은 천금의 무게를 지녀야 한다. 그러나 지난 24일 해외 기자 간담회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보여준 인식은 가벼움을 넘어 참담한 수준이었다. 그는 50년간 대북 심리전의 핵심이었던 대북 방송을 "바보짓...
  4. 민주당 '유동규 녹취록 속 대통령은 '윤석열'? 백광현 되치기 기자회견 17일 오전 백광현 씨가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유동규와 남욱의 녹취록을 추가로 공개했다. 해당 녹취록에는 '이재명' 이름이 언급되어 있어 후폭풍이 예고된다. 이번 기자회견은 지난 12일 진행한 기자회견의 후속편으로,  (2023년 봄 녹음)된 것으로, 대장동 사건을 두고 두 피고인이 대화를 나누는 내용이 담겼다. 이 녹취록에서 ...
  5. 민주당을 향한 외통수 "대장동 환수법" 국가가 대장동 개발 비리 사건의 범죄 수익 환수를 공식적으로 포기한 상황에서 논란의 항소포기를 중심에서 처리한 박철우 검사는 서울중앙지검장으로 영전했다. 박철우 검사를 서울중앙지검장에 앉힌 인사는 이 사태의 본질을 명확히 보여준다. 이것은 실패에 대한 문책이 아니라, 성공적인 임무 완수에 대한 포상에 가깝다. 검찰 조직을...
  6. 탱크만 없는 계엄령, 그 거대한 수용소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23일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교민들에게 "또 계엄하는 거 아닌가 걱정되실 텐데, 그런 일 없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좌중에서는 웃음이 터졌다고 한다. 그러나 서울에서 이 소식을 접한 국민들은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는다. 국정 최고 책임자의 그 한가한 농담은, 지금 대한민국이 처한 절체절명의 위기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
  7. 이낙연 "대장동 항소 포기는 국가 주도 범죄... 전체주의 망령 어른거려" 이낙연 "대장동 항소 포기는 국가 주도 범죄... 전체주의 망령 어른거려"대장동 항소 포기와 사법 시스템 붕괴 비판이낙연 새미래민주당 상임고문(전 국무총리)이 19일 유튜브 채널 '류병수의 강펀치'에 출연해 검찰의 대장동 개발 특혜 의혹 사건 항소 포기를 "국가가 나서서 범죄자를 도와준 국가 주도 범죄"라고 규정하며 강하게 비판...
  8. YTN의 ‘자발적 복종’ 더불어민주당이 ‘국론 분열을 조장하는 중대한 국기문란 행위’라는 좌표를 찍자, YTN은 국민의힘 주진우 의원의 풍자 영상을 다룬 보도를 삭제하고 한 발더 나아가 ‘정치인 SNS 영상 사용 금지’라는 사실상의 백기를 들었다. 모든 일은 순식간에, 그리고 질서 정연하게 일어났다.'국기문란(國基紊亂)'. 유신 시대의 낡은 ...
  9. 프랑켄코리아 (Franken-Korea) 정치라는 무대 위에는 때때로 기이한 혼종(混種)이 등장한다.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아니라, 이미 사라졌다고 믿었던 과거의 망령들을 덕지덕지 기워 붙여 만든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같은 것.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정권의 모습이 그러하다. 이들은 놀라울 만큼 창의성 없는 방식으로, 역대 정권들이 저질렀던 최악의 실수와 가장 추악했던 .
  10. 국민연금 손대려는 정권, 그래놓고 청년더러 "속았다" 하는가 아침 출근길 지하철 풍경을 유심히 본 적이 있는가. 붐비는 객차 안, 이어폰을 꽂고 스마트폰 화면에 몰입해 고개를 끄덕이는 4050 중년들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들의 작은 화면 속에서는 어김없이 '그'가 등장한다. 더부룩한 수염에 특유의 건들거리는 말투, 김어준 씨다.그 화면 속에서 김어준 씨와 패널들은 혀를 차며 말...
후원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