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초, 녹음실은 일종의 성소(聖所)였다. 그리고 녹음실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기억속 대부분은 언제나 담배 연기로 자욱했다. 지금이야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그때는 그랬다. 수억 원을 호가하는 스튜디오 콘솔 위, 그 값비싼 기계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뻘건 오뚜기 케찹통이 재떨이로 쓰이던 시절. 우리에게 음악은 그 연기 속에서 피어나는 것이었다. 당시 업계에서 가장 유명했던 모 엔지니어 선배의 자랑은 "나는 라이터가 필요 없어"라는 말이었다. 담뱃불을 다시 붙일 틈조차 없이, 줄담배를 피워 물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담배 연기가 주는 두통과, 밤샘 작업에 절은 선배들의 거친 농담과, 기약 없는 재녹음의 짜증, 그 모든 고통의 총량이 곧 음악의 진정성이라 믿었던 시절이었다. 우리는 한 음 한 음을 '만들어냈다'. 지금과 달리 당시 테이프 방식의 녹음은 아날로그적 한계가 명확했다. 물리적으로 100회 언저리쯤 재 녹음을 하다보면 그 부분이 늘어져 다른 악기도 전부 새로운 테잎에 다시 녹음해야하는 악몽말이다. 그렇게 보컬은 내 심 틀릴수 있는 안전한 횟수를 마음속에 카운트하며 노래해야 했고, 자기 파트를 기다리는 세션맨들은 배달음식에 고량주를 마시곤 했었다. 그리고 모두가 그 지난한 과정을 거쳐 나온 결과물만이 진짜 음악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픽 : 박주현
그 견고했던 믿음에 균열을 낸 것이 바로 ‘샘플링’이라는 이단(異端)이었다. 처음 그 개념을 접했을 때, 대부분의 선배들은 코웃음을 쳤다. 그건 음악이 아니었다. 남의 앨범에 들어간 기타 리프, 잘 빠진 드럼 비트를 '복사'해서 '붙여넣기' 하는 짓거리가 어떻게 음악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초창기 샘플음악을 추구하던 일부 가수들은, 당시 해외의 유명 샘플링 CD 한 장을 거의 통째로 가져다 붙여넣기 한 댄스 앨범을 버젓이 발매하던, 그야말로 ‘날먹’이 더욱 거부감을 부추겼다. 록 음악과 실제 연주만이 진짜라고 믿었던 우리에게, 샘플링은 음악에 대한 모독이자 혐오의 대상이었다. "저건 사기야, 사기." 술자리에서 선배들은 그렇게들 말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개인적으론 지금도 ‘샘플링’이라는 방식에 선뜻 손이 가지는 않는다. 수십 년간 몸에 밴 ‘노가다 정신’이 어디 가겠는가. 하지만 그 시절에 비하면 거의 보살 수준으로 관대해진 것은 사실이다. 물론, 그 이유가 유독 귀엽고 예쁜 아이브의 존재 때문만은 아니다. (아주 약간의 영향은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이브 [스타쉽 엔터테인먼트 제공]사실 아이브가 처음도 아니었다. 그 멜로디의 영혼은 이미 여러 생을 살았다. 2000년, 영국의 악동 로비 윌리엄스는 ‘I Will Survive’의 현악기 파트를 가져와 제임스 본드 영화처럼 비장하고 능청스러운 ‘Supreme’을 만들어냈고, 2009년 푸시캣 돌스는 아예 원곡의 후렴구까지 통째로 집어넣어 디스코 파티의 절정을 보여주는 ‘Hush Hush; Hush Hush’를 탄생시켰다. 이쯤 되면 이 멜로디는 샘플링계의 ‘사골’이라 불러도 될 정도다.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더 기묘해진다. 생물학적 부모는 엄연히 다른데, 소름 돋게 닮은 도플갱어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지금도 음악 좀 듣는다는 양반들이 모이는 레딧의 음악커뮤니티에서는 ‘I Will Survive’의 잃어버린 쌍둥이 형이 아니냐는 논란이 끊이지 않는 곡이 있다. 바로 영화 ‘록키’의 주제곡 중 하나인 빌 콘티의 ‘Going the Distance’다. 더 놀라운 건, 이 곡이 ‘I Will Survive’보다 2년 먼저 세상에 나왔다는 사실이다. 두 곡을 연달아 들어보면 ‘어?’ 하게 된다. 직접적인 샘플링 관계가 전혀 아님에도, 마치 같은 설계도로 지은 다른 건물처럼 닮아있다. 왜일까? 두 곡 모두 비장한 단조(마이너 스케일)를 기반으로, 현악기들이 비슷한 방식으로 울부짖고, 베이스 라인이 비슷한 계단을 우울하게 걸어 내려가기 때문이다. 의도한 인용이 아니라, ‘패배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투지’라는 감정이 우연히 같은 느낌의 멜로디라는 옷을 입고 태어난, 음악사의 가장 거대한 우연 중 하나인 셈이다.
그러니 아이브가 한 일은 단순히 40년 전 노래를 가져온 게 아니었다. 어쩌면 그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생존’을 노래했던 원곡과 ‘불굴의 투지’를 노래했던 그 쌍둥이 형의 DNA까지 한꺼번에 현재로 소환해낸 것일지도 모른다. 그 절박한 감정의 총합을 가져와, 21세기 소녀들의 당돌한 ‘사랑 고백’으로 탈바꿈시키는 영리함이라니.
이제 와 생각해보면, 그 시절 녹음실을 채웠던 담배 연기는 음악의 본질이 아니었다. 그저 그 시대의 풍경이었을 뿐이다. 결국 중요한 건, 그 재료가 기타리스트의 피 묻은 손가락이든, 자욱한 담배 연기든, 아니면 40년 전 디스코 명곡의 한 소절과 그 쌍둥이 형의 유령이든, 그걸로 기어이 지금 세대의 심장을 뛰게 하는 근사한 한 접시를 만들어내는 '손맛'이라는 것을. 나는 그 한 접시를 맛본 뒤, 오랜 시간 품어왔던 나의 꼰대력을 기분 좋게 무장해제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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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녹음실을 채웠던 담배 연기는 음악의 본질이 아니었다. 그저 그 시대의 풍경이었을 뿐이다. 결국 중요한 건...중략... 그걸로 기어이 지금 세대의 심장을 뛰게 하는 근사한 한 접시를 만들어내는 '손맛'이라는 것을. 나는 그 한 접시를 맛본 뒤, 오랜 시간 품어왔던 나의 꼰대력을 기분 좋게 무장해제 당했다.
생각해 볼 내용이네요.
와 정말 다 똑같은 멜로디를 사용한 각기 다른가수의 나른노래들이네요, 아이브의 노래 초반 도입부가 좋았던 이유가 이 익숙함 때문이라는 걸 새삼 느낍니다. 좋은 기사 감사합니다.
샘플링이 아!! 하게끔 만들어서 좋아요 좋은 기사 감사합니다
오..몰랐던 샘플링도 있네요. 친절하게 해당부분 플레이되게 해 놓으셨음
옛날 생각나서 반가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