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이 결국 강선우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를 임명할 것으로 보인다. 강 후보자가 지명된 뒤 드러난 보좌직원에 대한 여러 사적 업무 지시와 갑질, 병원 방문시의 갑질, 정영애 전 여성가족부 장관에 대한 예산 볼모 갑질 등 고발들은 지난 몇 주간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강후보자에 대한 반대 여론은 여야와 단체를 가리지 않고 분출되었다. 정의당, 민주노동당, 진보당 등 지난 대선에서 민주당과 손 잡았던 야당들과 개혁신당, 92개 여성단체, 노동계와 시민사회가 자진사퇴, 또는 임명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민주당과 국민의힘의 보좌진협의회, 민주당보좌진협의회의 역대 회장단까지 지명철회를 요구했다. 이로서 ‘강선우 불가론’은 어느 한 정파, 몇 개 단체의 입장이 아닌, 전 사회적인 공감대가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이재명 대통령은 강 후보자를 장관으로 임명할 것이다. 성남, 경기도 시절부터 그의 인사 스타일은 단 하나, ‘철저한 내사람 챙기기’ 로 알려져 있다. 이번 ‘강선우 사태’는 자치단체장 때의 인사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의 역풍을 초래했지만 그럼에도 대통령은 임명을 택할 것이다. 지금의 대통령 역시 과거의 시장, 도지사가 아니라 더 큰 권력을 가진, 취임 한 달 겨우 지난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정도’ 논란은 당연히 돌파할 수 있다고 볼 것이다. 용산에서는 과거 문재인정부 시절 ‘조국 사태’를 예로 들며 정권 초기에 ‘밀리면 안 된다’는 논리가 힘을 얻고 있다고 전해진다.
민주당 의원들 역시 강 후보자 방어에 나섰다. 민주당식 표현으로 ‘빛의 혁명’ 을 통해 집권한 여당이, 들끓는 국민여론을 정면으로 부정하며 가해자 방탄에 전념하는 모습은 익숙한 듯 또한 낯설다. 심지어 민주당내에서는 강 후보자의 예산 갑질을 밝힌 정영애 전 장관에 대한 비난마저 불거지는 지경이다. 당내 인사들이 유튜브에 출연해 정 전 장관을 비판하고 '갑질이 없었다'며 방어하고 몇몇 의원들은 '장관이 그런 식으로 말하면 상임위원 노릇을 어떻게 하라는 거냐' 며 정 전 장관을 탓한다. 민주당 의원들에게 '상임위원 노릇=갑질' 인 것인가.
완전히 변해버린 그들의 모습, 아니면 원래 그랬을지도 모르는 모습들은 ‘정치를 왜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일으킨다. 이 나라의 소위 ‘리더’들에 대해 깊은 회의감을 갖게 한다.
민주당 의원들이 경쟁하듯 강 후보자를 옹호하는 것은 의원회관의 고질병인 보좌진에 대한 갑질과 학대에 대한 암묵적 인정이며 자신의 미래에 대한 보험이다. 그들은 ’현역불패’ 신화를 지키고 싶다. 의원들의 마음 속에는 '나도 혹시?' 가 있기 때문이다. 자신 역시 보좌진과의 관계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한 의원들은 '혹시 우리방 보좌진들도? 라는 생각 때문에 내심 찔린다. 갑자기 예전 의원이 전화를 걸어 사과 비슷한 소리를 하는 걸 들었다는 보좌진들이 요즘 여의도에 수두룩한 것도 그 때문이다. 또한,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나도 혹시' 언젠가 장관직에 발탁될지도 모른다는 야무진 꿈 때문에, 의원들은 동업자의 ‘사소한’ 잘못을 나무라지 않는다.
앞으로 이틀 정도 더 큰 일이 없다면 강선우 후보자는 이 정부의 첫 번째 여성부장관이 될 것이다. 그의 행태를 고발했던 보좌진들은 지금보다 더한 절망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의원의 앞길을 막으려고 한 '무엄한 직원들'로 찍혀 국회를 떠나게 될지도 모른다. 실명으로 그를 비판했던 극소수의 민주당 인사들 역시 입지가 좁아질 게 뻔하다. 소수 의견을 용납하지 않는 것을 '집단지성'이라고 믿는 것이 지금의 민주당이기 때문이다. 지명철회와 사퇴를 요구했던 대다수 시민. 여성단체 인사들은 어떻게 할까. 그들은 강선우의 여가부와 협업할 수 있을까. 추운 날 촛불을 들고 민주당에 대해 절대적인 지지를 보여준 여성들은 이 모든 과정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도덕성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강 후보자 입장에서는 장관이 된다면 성과 내기가 시급하겠지만 뜻대로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잘못된 리더 한 사람이 자기가 속한 조직을 망가뜨리고 사회 전체의 도덕성, 유능함, 신뢰 수준을 후퇴시키고 마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강선우 사태는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듯한, 불편한 ‘데자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