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6월 25일, 수백만 명의 피와 눈물로 얼룩진 6.25 전쟁이 발발한 지 75년이 되는 날이었다. 국가의 명운이 걸렸던 그날을 기리며 대한민국의 최고지도자는 "군사력에만 의존해 국가를 지키는 시대는 지났다"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가장 확실한 안보는 싸울 필요가 없는 상태, 즉 평화를 만드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이 말은 그 자체로 평화를 향한 인류 보편의 열망을 담고 있어 숭고하게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이 수사는 우리가 발 딛고 선 2025년의 냉엄한 현실과 위험할 정도로 동떨어져 있다. 이는 북한의 노골적인 적대 노선, 재무장으로 치닫는 세계적 흐름, 그리고 75년 전 바로 그날의 뼈아픈 교훈을 외면한 안일한 현실 인식이자, 국가의 생존을 위협할 수 있는 위험한 메시지다. 평화는 선언으로 지켜지지 않는다. 평화는 힘의 균형이 깨졌을 때, 그리고 침략자가 상대의 의지를 오판했을 때 가장 먼저 무너진다.
625 75주년을 맞이해 평화를 호소하는 포스팅을 올린 이재명 대통령 (사진=이재명 페이스북)
대통령의 메시지가 얼마나 공허한지를 가장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은 바로 북한의 공식 정책과 실제 행동이다. 불과 1년 전, 김정은은 대한민국을 '화해와 통일의 대상'에서 '제1의 적대국'이자 '불변의 주적'으로 규정하도록 헌법을 개정하라고 지시했다. 이는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다. 남북을 잇던 경의선 철도를 물리적으로 파괴하고, '통일'이라는 단어 자체를 삭제하며 대한민국을 완전한 타자, 제거해야 할 적으로 공식화한 것이다. 이는 언제든 전쟁을 개시할 수 있도록 명분을 쌓고 내부를 결속하기 위한 명백한 사전 정지작업이다.
더욱 섬뜩한 것은 2022년 9월 법제화된 핵무력 정책이다. 이 법령은 북한 지도부나 핵 지휘통제체계에 대한 공격이 임박했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도 핵무기를 선제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명시한다. 심지어 지휘부가 위협받을 시 "자동적으로 즉시에 핵 타격이 단행된다"는 조항까지 포함시켰다. 이는 핵을 보복 수단이 아닌, 선제공격과 실제 전쟁 수행을 위한 도구로 삼겠다는 공언이다. 이런 상황에서 "군사력에만 의존하는 시대는 지났다"는 메시지는, 핵으로 위협하는 상대에게 '우리는 당신들의 위협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혹은 '우리는 대응할 의지가 약하다'는 최악의 신호를 보낼 수 있다. 바로 대통령의 메시지가 나온 지 불과 6일 전, 북한은 한미일 연합훈련에 반발하며 서해상으로 10여 발의 방사포를 발사했다. 포성이 채 가시지 않은 땅에서 평화의 당위성을 역설하는 것은 공허함을 넘어 위험하다.
'군사력의 시대가 지났다'는 인식은 한반도를 넘어 전 세계적인 시대정신과도 정면으로 배치된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2023년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은 '힘없는 평화'가 얼마나 허약한지를 전 세계에 각인시켰다. 우크라이나의 처절한 항전은 주권과 영토가 결국 압도적인 군사력과 국민의 항전 의지로 지켜진다는 고전적 진리를 재확인시켰다. 대통령은 "평화가 곧 경제"라고 했지만, 우크라이나의 사례는 그 명제가 틀렸음을 보여준다. 진실은 '안보가 곧 경제'다. 튼튼한 안보라는 토대 없이는 어떤 경제적 번영도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이에 세계 각국은 경쟁적으로 재무장에 나서고 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국방비를 GDP의 2% 이상으로 끌어올리고 있으며, 영국 총리는 2035년까지 5% 수준으로 올리겠다고 공약했다. 우리의 이웃 일본은 평화헌법의 족쇄를 풀고 방위비를 GDP의 2% 수준으로 증액, 불과 5년 만에 두 배 가까이 늘릴 계획이다. 모두가 힘을 기르며 다가올 위협에 대비하는 '각자도생'의 시대에, 우리만 군사력의 역할을 과소평가하는 듯한 메시지를 내는 것은 시대착오적일 뿐 아니라, 동맹의 신뢰를 저해하고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길이다.
한반도를 둘러싼 지정학적 환경은 더욱 험악해지고 있다. 2024년 6월, 북한과 러시아는 한쪽이 침공받으면 '지체 없이 군사적 원조를 제공'하는, 사실상의 자동 군사 개입 조항이 포함된 조약을 체결했다. 이는 1961년 '조소 동맹'의 부활이며,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러시아가 북한의 군사적 후견인을 자처한 것이다. 이로써 북한은 국제 제재를 무력화할 방패와, 재래식 무기를 주고 첨단 군사 기술을 얻을 창을 동시에 손에 쥐게 되었다.
이러한 권위주의 블록의 결속에 맞서 한미일 3국은 안보 협력을 전례 없는 수준으로 강화하며 균형을 맞추고 있다. 이는 선택이 아닌 생존을 위한 필연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 최고지도자가 군사력의 역할을 평가절하하는 것은 동맹국들에게 '대한민국은 과연 우리와 함께할 의지가 있는가'라는 의구심을 심어주기에 충분하다. 이는 동맹의 결속을 약화시키고, 적에게는 우리 내부의 분열이라는 잘못된 신호를 보내 오판을 유도하는 심각한 '전략적 부조화'다.
6.25 전쟁 75주년에 우리가 되새겨야 할 가장 중요한 교훈은 전쟁이 '오판'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김일성의 야욕은 남북 간의 압도적인 군사력 불균형과, 미국의 방어 의지에 대한 치명적 오판이 더해져 현실이 되었다. 1950년 1월, 딘 애치슨 미 국무장관이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에서 한반도를 제외하는 듯한 발언을 한 '애치슨 라인'은, 스탈린과 김일성에게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준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의도와 무관하게, "군사력에만 의존하는 시대는 지났다"는 발언은 21세기판 '애치슨 라인'으로 기능할 수 있다. 이미 대한민국을 '주적'으로 명시하고 핵 선제 사용을 공언한 북한에게, 이는 남한 지도부의 대응 의지가 약하다는 신호로 읽힐 수 있다. 침략의 대가는 낮고 성공의 가능성은 높다고 판단하게 만드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다. 선의에 기댄 평화는 침략자에게 가장 매력적인 기회의 창을 열어줄 뿐이다.
물론, 누구도 전쟁을 원치 않는다. 평화는 지상의 목표다. 그러나 평화를 지키는 방법은 평화를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도 감히 우리를 넘볼 수 없도록 만드는 압도적인 힘을 갖추는 것이다. 6.25 전쟁 75주년을 맞아 국가 최고지도자가 던져야 할 메시지는, 희생자에 대한 추모와 함께, 다시는 그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굳건한 안보 의지, 그리고 그 의지를 뒷받침하는 강력한 국방력과 동맹에 대한 확고한 신뢰여야 했다.
지금은 환상에 기댈 때가 아니다. 북한은 더욱 노골적으로, 세계는 더욱 험악하게 변하고 있다. 이런 현실을 직시하고, '힘을 통한 평화'를 구축하는 것만이 75년 전 스러져간 수많은 영혼의 희생에 답하고, 우리 후손들에게 진정한 평화를 물려주는 유일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