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에 태운 소녀상 (윤미향 전 의원 페이스북 캡쳐)
이 사진을 보고 진한 감동을 받는 이도 있을 것이고 원인 모를 불편한 감정이 온 몸을 스멀스멀 덮은 분도 있을 것이다. 윤미향 전 의원이 10일 '평화의 소녀상'을 자신의 차에 태우고 광화문으로 향하는 장면, 또한 굳이 이 사진을 찍어 게시하는 의도, 본인의 비판자들에게는 호기롭게 "불쌍하다" 조롱하는 심성.
이 모든건 그가 위안부 피해자들을 어떻게 인식해왔는지를 보여주는 섬뜩한 자기고백이다.
'현실세계'의 법정에서는 몰라도 본인 '양심의 법정'에서는 꿈에도 잘못한 것이 없는 그의 세계에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은 독립된 인격체가 아니다. 그들은 윤미향이라는 존재를 지탱하기 위해 세 가지 역할로 존재하는 객체일 뿐이다.
'영원한 소녀'
윤미향에게 할머니들은 영원히 '소녀'여야 한다. 그들이 겪은 고통은 끔찍했지만, 그 '소녀성'은 운동의 동력을 극대화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소녀는 순수하고, 연약하며,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다. 이 프레임은 대중의 즉각적인 연민을 끌어낸다.
그러나 이 '소녀' 프레임은 동시에 피해자들의 주체성을 거세한다. 소녀는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기보다 보호자의 인도를 따라야 한다. 윤미향은 이 '유일한 보호자' 역할을 자처하며 피해자들을 철저히 유아화했다. 피해자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거나, 윤미향의 방식에 이의를 제기할 때(이용수 할머니의 폭로처럼), 그것은 '보호자에 대한 배신' 혹은 '외부 세력의 농간'으로 치부되었다. 윤미향은 할머니들이 나이 든 현자가 아닌, 영원히 상처 입은 채 자신에게 의존하는 '소녀'로 남아있을 때만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영원한 어머니'
동시에 윤미향은 피해자들을 자신의 '어머니'로 호명한다. 이는 한국 사회의 가장 신성한 관계인 모녀 관계를 끌어들여 자신의 활동에 신성불가침의 영역을 구축하려는 전략이다. 그는 자신을 어머니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는 '효녀'로 포지셔닝한다.
이 가족 관계 설정은 그의 탐욕을 정당화하는 기제로 작동했다. 공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져야 할 후원금 관리가 사적인 '가족사'로 둔갑하는 순간, 도덕적 해이는 필연적이다. 고(故) 김복동 할머니의 조의금 명목으로 거액을 개인 계좌로 모금해 다른 용도로 사용한 혐의 등이 대법원에서 유죄로 인정된 사실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공금 횡령 이전에, '어머니의 돈은 곧 내 돈'이기에 양심에 조금도 거리낄 일이 없이 당당한 것이다. 자신을 욕하는 사람들이 '불쌍한 것'도 이런 이유다.
너희들은 이런 어머니 없잖아.
그는 공적인 책무를 사적인 관계로 치환함으로써 감시와 비판을 회피했다. 그에게 쏟아지는 비난은 곧 '병든 어머니를 돌보는 딸에 대한 패륜적 공격'이 된다. 이 전략은 매우 효과가 있어서, 지면을 빌어 그를 비판하는 나 역시 불편한 죄의식을 느낀다.
'영원한 조각상'
살아있는 할머니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생존자들이 그의 통제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자, 윤미향의 집착은 '조각상'으로 향한다. 조각상은 말이 없다. 조각상은 배신하지 않으며, 그의 방식에 토를 달지 않는다. 그것은 윤미향이 원하는 대로 해석하고, 원하는 곳에 배치할 수 있는 완벽한 상징물이다.
그가 소녀상을 자신의 차에 태운 행위는 이러한 물신화의 정점이다. 그는 더 이상 살아있는 피해자들을 필요로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정치적 생존을 보장해 줄 '상징 권력'이며, 소녀상은 그 권력의 물리적 현현이다. 그는 소녀상을 소유함으로써 위안부 운동의 정통성이 자신에게 있음을 과시하려 한다.
이는 역사의 비극을 자신의 나르시시즘을 충족시키기 위한 무대 소품으로 전락시키는 행위다. 소녀상은 더 이상 피해자들의 고통을 기억하는 매개체가 아니라, 범죄 혐의로 유죄 판결(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3년 확정)을 받은 윤미향 개인을 보호하는 차갑고 단단한 갑옷이 되었다. 그는 조각상 옆에 앉음으로써 자신과 역사를 동일시하고, 자신의 몰락이 곧 역사의 후퇴라는 망상에 빠져있다.
기생적 관계의 종말을 고해야 할 때
소녀이자 어머니이자 조각상을 태우고 담요까지 덮어 차에 태워 콧노래를 부르며 운전했을 윤미향.
처음에는 그도 위안부 할머니를 향한 진정성으로 운동을 시작했으리라.
문제는 세월이다.
돈도 되고, 소셜 포지션도 만들어주고, 정치인도 만들어 주고, 죄 짓고 사면도 받게 하고, 다가올 선거에선 다시 당선도 되게 해주고, 이에 대한 비판 마저 막아주는 만능방패가 되는 조각상을 모시고 그는 광화문으로 간다.
한 사람의 가슴에 진정성만 남아 있기에는 너무 긴 세월이 흘렀다. 그가 더 뻔뻔해지지 않기만을 바라본다.
이 기사에 11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왜 소름끼치고 불쾌했는지 설명해 주시네요.
윤미향에게 할머니들은 소녀상은 집회참여자들은 그저 돈벌이들 일뿐~
돈벌이와 명예, 사회적 지위를 얻기 위한 눈물겹고 처절한 노력. 감탄스럽고 존경스럽다고 해야 할까요. 좋은 기사 감사합니다.
다 돈벌이
저런 조각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자체가 우상숭배같은 느낌이네요 자신이 무슨일을 하고있는지도 모르는것같네요
ㅇㅁㅎ 하는 짓이 너무 역겹네요
이게 무슨 기괴한 밥벌이인가
돈이 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는 않는 악마들이 정치를 하면 국민들 머리 위에서 세금 축내는 기생충이지
정신착란자들...파시즘의 시대 ㅠ
저 인간도 좀 소시오패스 같아요...악령 깃든 일본 음습한 인형 보는 거 같은 느낌..어마어미한 돈미새구나 싶고요...
소름끼치는 캐릭터입니다. 저런 creature가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고 다니다니 참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