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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아웃에서 스스로를 지키는 플레이리스트
  • 박주현 칼럼니스트
  • 등록 2025-08-08 21:5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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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혼이 소진된 듯한 밤.
  • 분노와 공허를 메워주는, 나를 구한 플레이리스트,

언젠가부터 우리는 모두 병들어가고 있었는지 모른다. 정치판의 저열한 소란과 끝없이 엉켜버린 일상의 파도 속에서, 우리의 영혼은 날마다 조금씩 닳아 없어지는 것만 같았다. 이것은 그 소진의 한복판에서, 나 자신이 나를 구하기 위해 벌였던 작은 사투에 대한 고백이다.


그래픽: 박주현 우리에겐 현실을 벗어나야 할 순간이 필요하다.

한때는 세상을 바꾸겠다 믿었던 적이 있었다. 적어도 분노하고 목소리를 내면, 비상식이 상식을 이기는 일만은 막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날 밤, 나는 완전히 소진된 나를 발견했다. 일을 마친 후에도 손에서 놓지 못한 스마트폰, 그 검고 차가운 유리판 위에는 온갖 막말과 선동, 비아냥이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세상을 보는 창이 아니라 내 영혼의 에너지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었다. 나는 잠들지 못했고, 분노했지만 무력했으며, 무엇보다 너무나 지쳐 있었다.


바로 그런 날 밤이면, 한잔생각이 간절하지만 눈을 한번 질끈 감고 오래된 스피커의 전원을 켠다. 거실의 먼지 쌓인 선반에서, 나는 2년 전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난 류이치 사카모토의 ‘Merry Christmas Mr. Lawrence’를 찾아낸다. 첫 음이 흐르는 순간, 시간의 흐름이 바뀌는 것을 느꼈다. 피아노 소리는 밤의 적막 속으로 번져나가지 않고, 오히려 나를 중심으로 단단하고 투명한 막을 만들어주는 듯했다. 밖에는 여전히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겠지만, 이 소리의 공간 안에서 나는 안전했다. 그날 나는 깨달았다. 세상을 바꾸기 전에, 먼저 나를 지켜냈어야 했다는 것을.



그날 이후 누구나 처럼 ‘나를 위한 연주회’가 열리기 시작했다. 나는 나를 위한 플레이리스트, 즉 ‘생존 목록’을 만들기 시작했다.


가슴에 도무지 삭힐 수 없는, 차라리 차갑고 날카로운 분노가 들끓는 날이 있다. 상식 이하의 궤변이 정의로 포장되고, 거대한 선동이 대중의 눈을 가리는 것을 목격한 날이면 그랬다. 그럴 때 나는 뮤즈(Muse)의 ‘Uprising’을 플레이리스트의 맨 위에 올린다. 쿵, 쿵, 쿵. 심장 박동처럼 울리는 단순하고도 강력한 베이스라인은 흩어져 있던 분노를 하나의 거대한 행진 대열로 집결시킨다. '그들이 우리를 통제하지 못하게 하리라(They will not control us)'는 절규에 가까운 외침은, 단순한 음악을 넘어 나 자신의 저항 선언이 된다. 내 안의 무력감을 떨쳐내고, 비상식에 맞설 개인의 존엄을 일깨우는 장엄한 행진곡이다. 이 칼럼을 위해 뮤즈를 검색하다가 아시아 투어의 일환으로 9월 27일 인천 문학경기장에서 내한 공연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작은 소득이다.



반대로, 세상의 모든 것이 부조리하게 느껴져 깊은 무력감에 빠지는 날에는 존경이라는 수식어도 부족한 엔니오 모리코네의 ‘Toto and Alfredo Ver.2’를 꺼내 듣는다. 벌써 십수년째 벨소리로 사용하며 질리도록 들었지만, 시네마천국에서 이탈리아의 평온한 일상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세어 나오던 그 바이올린 선율과 두근거림은 아직도 나를 들뜨게 만든다. 마치 모든 더러움 저편에 분명히 존재하는 어떤 순수한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이 아름다움이 존재하는 한, 세상은 아직 완전히 망가지지 않은 것이라고, 그렇게 스스로에게 말을 건다.



머릿속이 온갖 잡다한 뉴스와 정보들로 뒤엉켜 터져버릴 것 같은 날의 처방전은 루도비코 에이나우디의 ‘Nuvole Bianche (하얀 구름)’이다. 단순하고 깨끗한 멜로디의 반복은 마치 마음의 창에 낀 먼지를 부드러운 빗물로 닦아내는 것 같다. 복잡했던 세상이 서서히 옅어지고, 마침내 텅 빈 하늘에 떠 있는 흰 구름 같은 평온이 찾아온다.



그리고 이 모든 감정의 파도가 휩쓸고 지나간 뒤, 나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1번’으로 돌아온다. 특히 요요마의 연주는 첼로라는 악기의 깊이와 세련된 연주로 수백 년 전 한 인간이 구축해낸 이 완벽한 소리의 건축물 앞에 서게 만들고, 이내 오늘의 이 모든 소란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깨닫게 된다. 흔들리던 나의 정신은 비로소 단단한 질서의 반석 위에 다시 세워진다.



물론 이 노래들이 세상을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뉴스를 켜든, 인터넷창을 펼치든 어김없이 또 다른 소음이 우리를 공격해 올 것이다. 하지만 이제 괜찮다. 우리에겐 우리를 우리답게 되돌리는 회복력과 힘든 상황에도 웃을 수 있는 여유와 혼자 걷고 있지 않다는 믿음이 있으니까. 서로의 이야기에 귀기울이고, 음악으로 닳아 없어진 영혼을 다시 채우고, 우리 자신을 오롯이 긍정할 힘을 얻게 될 것이다. 부디, 당신에게도 당신을 살려낼 노래가 있기를. 세상의 모든 소음보다, 당신 내면의 소리가 더 크고 단단해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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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 2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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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enny11272025-08-09 13:59:31

    좋은 음악 추천 감사합니다 잘 들어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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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uest2025-08-08 22:50:57

    팩트파인더 힙힙 감사합니다 주말에 특히 도움 받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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