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아주 오래전에 졌던 빚 때문에 갑자기 연락을 받아보신 적 있으신가요? 예를 들어 10년도 더 지난 카드값 천만 원이 이자까지 붙어 1억이 되었다고 해봅시다. 법적으로는 이미 안 갚아도 되는 '죽은 빚'인데, 추심 업체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정이 딱하시니, 만 원이라도 먼저 갚으시면 조정해 드릴게요." 만약 이 말을 믿고 만 원을 입금하면, 1억 원 빚 전체가 살아날 수 있습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소멸시효 완성 후 일부변제는 시효이익의 포기로 추정된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대법원 판례였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했습니다.
소멸시효는 채권이 장기간 행사되지 않아 증거와 기억이 희미해진 상태에서 새삼 추심이 되는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보완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권리 위에 잠자는 자에 대한 일종의 패널티 같은 제도입니다. 변제한 쪽은 다 갚은 채무에 대해 굳이 증거와 자료를 보관하며 관리하지 않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증거의 편향성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채권자가 변제를 받고도 채권증서를 폐기하지 않고 있던 중 오랜 세월이 지나 이를 발견하거나(때로는 고의로 지연이자를 축적하기 위해 독촉하지 않거나), 당사자가 아닌 사람이 이를 획득하여(상속인이 우연히 차용증 발견) 새삼 추심에 나선다면, 채무자로서는 이중변제의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를 적절히 보정해 주는 제도가 소멸시효입니다.
소멸시효 지난 빚이 어느날 당신을 찾아올 때 (그래픽-가피우스)
이 특성으로 인해 채무자가 스스로 “나 그거 안 갚은거 기억나. 지금이라도 갚을게”라고 한다면 시효제도를 둔 이유를 고집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럴 때 법은 후퇴하고 채무자의 의사가 관철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시효완성 전에 일부변제를 하면 채무의 승인이 되어 시효가 중단되고, 시효완성 후라도 채무자가 변제를 하면 유효한 변제가 됩니다. 이런 취지로 소멸시효 완성 후 일부변제를 하면 소멸시효 이익을 포기한다고 해석했던 것이 법원의 입장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일부변제의 법리가 악용되는 현상이 발생한 겁니다. 추심업자들이 싸게 채권을 매수한 후 기억이 희미한 채무자들에게 일부변제를 유도 했던 것이지요. 이러한 부작용을 막기 위해 채권추심을 할 때는 채권자가 스스로 소멸시효 완성여부를 검토해 고지 하도록 법령에 규정하였습니다(개인금융채권의 관리 및 개인금융채무자의 보호에 관한 법률 제15조, 동시행령 제14조). 이에 따르면 채권자는 추심할 때 스스로 “당신의 채권의 이미 시효시효가 지나서 없어졌는데 혹시 갚을 생각 있는가요?”라고 해야 합니다. 현실적으로 뭔가 어색하지요? 이를 어겨서 얻는 이익이 큰데 선의에 기대어 이것을 지키라고 하는 것은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 최근 대법원에서 의미 있는 판결을 내놨습니다. 시효완성 후 일부변제가 시효이익 포기로 추정된다는 기존 판례를 변경한 것입니다. 소멸시효의 악용이 가능했던 원인을 바꾼 것입니다. 57년만에 이루어진 판례변경입니다. 이제는 오래된 빚의 일부를 갚았다고 해서 무조건 빚 전체가 살아나지 않습니다. 이제는 일부변제가 시효이익 포기의 의사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는 쪽에서 이를 증명할 책임을 떠안습니다. 기존 판례에 따르면 시효이익 포기가 추정되므로 채무자가 시효이익 포기 의사가 없었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했습니다. 증명책임은 소송실무상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무승부가 없는 민사소송에서 증명책임은 패소위험을 떠안는 효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판례변경으로 인해 최소한 채권추심 과정에서 시효이익 포기 법리를 악용하는 사례는 억제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고 안심할 일은 아닙니다. 시효이익 포기가 쟁점이 되려면 소송절차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것이 부담되거나 잘 모르고 지나가는 경우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법령이나 판례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간단한 팁을 알아 둡시다. 기억도 못하는 채무에 대해 갚으라는 요구를 받게 된다면 우선 “소멸시효가 언제인가요?”라고 물어 보세요. 법에 소멸시효를 밝히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거부하기 어렵습니다. 얼버무리면 안 갚아도 됩니다. 여기가 1차 방어선입니다. 만약 알려 주기는 하는데 소멸시효가 아직 지나지 않았다면서 거짓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제공해 주는 정보만 그대로 믿을 필요는 없습니다. 2차 방어선으로 “만약 소멸시효가 지났다면 갚지 않을 겁니다.”라고 문자나 등기나 이메일로 보내 놓으세요. 만약 고의로 거짓말을 한 것이라면 추심행위를 중단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렇게 해두고 채무감면이나 일부변제를 진행한다면 나중에 혹시 소멸시효가 지난것이 밝혀졌을 때 상황을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그 전에 전문가 상담을 권합니다). 이 단계까지 오는 경우는 희박할 것이며 앞선 대응으로 대부분 시효완성 포기의 위험은 해소될 것입니다.
법과 제도는 움직임이 느립니다. 그래서 정작 나에게 필요한 상황에 적용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가장 빠른 것은 스스로 최소한의 지식을 갖추는 것입니다. 오늘 글은 소멸시효에 대한 복잡한 원리가 아니라 최소한의 이해와 실전팁을 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오래된 채무에 대해 새삼 독촉 받을 때 오늘 내용을 기억해 주세요. 아는 것이 힘입니다.
이 기사에 20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와! 일반인들에게는 정말 유익한 정보에요! 기사 감사합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정보 감사요.
유용한 글이네요.감사합니다
모르고 있으면 당하기 쉽겠어요 좋은정보 감사합니다
유용한 지식나눔 감사합니다
넘넘 유익한 정보 감사합니다
정보 고맙습니다.
알고만 있고 써먹을 일은 없기를
믿고보는 김변칼럼!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유트브에서 다뤄주셨던 거 같은데 생활 속 법률지식. 좋은 글이네요~
아는 것이 힘 정말 중요한 말이에요 이 정보를 아직은 쓸 일이 없지만 중요한 때에 알고 있다면 큰 도움이 되겠죠 감사합니다
정보 고맙습니다
새로운 / 10년입니다
좋은 정보네요
소멸시효가 언제 인가요?
매우 유익한 정보
고맙습니다
넵
유익한 정보~~
유익한 글 감사합니다. 이런 지식을 활용할 일은 안생겼으면 좋겠습니다만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