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미사에는 독서라는 양식이 있다. 성경 구절을 세 곳 골라 읽고 신부가 이 주제로 강론한다. 지난 주일에는 드물게 유머러스한 구절을 독서했다. 아브라함이 야훼와 협상하는 창세기 18장이다.
야훼가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려는 걸 알게 된 아브라함이 야훼에게 다가간다. 이걸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진정 의인을 죄인과 함께 쓸어버리시렵니까? 혹시 그 성읍 안에 의인이 쉰 명 있다면, 그래도 쓸어버리시렵니까? 그 안에 있는 의인 쉰 명 때문에라도 그곳을 용서하지 않으시렵니까? 의인을 죄인과 함께 죽이시어 의인이나 죄인이나 똑같이 되게 하시는 것, 그런 일은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런 일은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온 세상의 심판자께서는 공정을 실천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죄인이 있겠지만, 의인도 있다. 온 세상의 심판자는 공정해야 하지 않는가. 무시무시한 구약의 하느님은 어떻게 나왔을까.
하느님과 협상중인 아브라함 (그래픽=가피우스)
“소돔 성읍 안에서 내가 의인 쉰 명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들을 보아서 그곳 전체를 용서해 주겠다.”
좋아. 의인 50명이 있다면 전체를 용서하겠다는 조건이다. 그런데 아브라함도 의인 50명이 없다는 건 잘 알고 있다.
“저는 비록 먼지와 재에 지나지 않는 몸이지만, 주님께 감히 아룁니다. 혹시 의인 쉰 명에서 다섯이 모자란다면, 그 다섯 명 때문에 온 성읍을 파멸시키시렵니까?”
5명 깍아서 45명. 작은 수치라도 일단 깍아본다. 야훼의 반응이 궁금하다.
“내가 그곳에서 마흔다섯 명을 찾을 수만 있다면 파멸시키지 않겠다.”
협상이 술술 풀리는 것 같다. 그러나, 45명의 의인이 없다는 건 아브라함도 잘 알고 있다. 5명 더 깍아본다.
“혹시 그곳에서 마흔 명을 찾을 수 있다면 …… ?”
“그 마흔 명을 보아서 내가 그 일을 실행하지 않겠다.”
5명씩 두 번을 깍았다. 당근 직거래에서 이렇게 계속 네고를 하면 현장에서 죽빵을 맞을지 모른다. 아브라함도 쫄았지만 용기를 내어 진상짓을 계속한다.
“제가 아뢴다고 주님께서는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혹시 그곳에서 서른 명을 찾을 수 있다면 …… ?”
이번에는 한번에 10명이다. 야훼의 반응은?
“내가 그곳에서 서른 명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 일을 실행하지 않겠다.”
틀림없이 당근 온도 99도다. 아브라함은 진상짓을 이어간다.
“제가 주님께 감히 아룁니다. 혹시 그곳에서 스무 명을 찾을 수 있다면 …… ?”
“그 스무 명을 보아서 내가 파멸시키지 않겠다.”
“제가 다시 한번 아뢴다고 주님께서는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혹시 그곳에서 열 명을 찾을 수 있다면 …… ?”
“그 열 명을 보아서라도 내가 파멸시키지 않겠다.”
여기까지가 아브라함과 야훼의 협상이다. 절대자에게 모든 걸 던져가며 치열한 협상을 했다. 한미간의 관세협상이 있던 주일 독서이지만, 천주교에서 그 문제 때문에 이 구절을 읽는 건 아니다. 온 세계의 가톨릭 교회는 같은 구절을 똑같이 읽는다.
과정을 보면 야훼는 엄청나게 양보를 한 것처럼 보인다. 허나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소돔과 고모라에는 의인이 10명도 없었기에 하나마나한 양보다.
의인 10명은 관세율 15%과 같이 그저 숫자일 뿐이다. FTA로 인해 0%이던 관세가 15%로 오르기 때문에, FTA를 안 맺고 있었던 다른 나라들의 15%와는 전혀 다른 수치다.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올라서는데 발판이 되었던 한미 FTA는 이제 무너졌다. 노무현이 지지층을 무너뜨리면서도 국가의 미래를 보고 밀어붙였던 바로 그 한미FTA다. 양문석은 한미 FTA를 보고서는 노무현에게 불량품이라고 막말을 퍼부었다. 김어준은 한미FTA매국송까지 만들며 조리돌림을 했다. 탁현민은 한미FTA매국송을 만들어 배포한 당사자다.
탁현민의 당시 트위터
“매국송1은 원초적 찬성자입니다. 지역별 시리즈로 만들 거니까 지역별로 명단정리 쌔려주시고 민주당 김진표를 비롯한 찬성의원들 명단도 정리해 쌔려주삼"
김진표가 악마화되는 시발점이기도 했다. 거대한 수익을 안겨줄 한미FTA에 반대하던 자들이 을사늑약이후 가장 불공평한 또다른 을사조약은 잘 맺었다며 반기고 있다. 나라를 이끌어가는 자들에게 어떤 진정성도 찾을 수 없다. 서로의 언발에 오줌을 누며, 니 발 아직 안 얼었잖아. 안심해, 괜찮아 서로를 속이고 있을 뿐이다.
이 시대에는 아브라함의 용기도 그 진정성도 없다. 아브라함은 협상에 실패했을까? 아니다. 야훼는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이 있는지 천사 2명을 보내 실사를 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 가족은 의인으로 분류해 구출 작전을 펼쳤다. 블랙호크다운 같은 치열한 구출작전 와중에 롯의 아내가 소금기둥이 되는 불상사가 있었지만, 롯과 두 딸은 무사히 구출되었다.
"하느님께서 그 들판의 성읍들을 멸망시키실 때, 아브라함을 기억하셨다. 그래서 롯이 살고 있던 성읍들을 멸망시키실 때, 롯을 그 멸망의 한가운데에서 내보내 주셨다."
대한민국에는 용기와 진정성을 가지고 협상하던 노무현 같은 지도자가 더 이상 없다. 당장 내일 들키더라도 오늘은 거짓말하는 이재명 같은 사람만 있을 뿐이다. 나라가 망해도 태권V 만만세하는 소돔과 고모라의 주민들 뿐이다. 이 시대에는 이제 누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 기사에 24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좋은 기사 감사합니다
암울하네요.기사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너무 슬픕니다.
제대로 하겠다는 인간은 안 보이고 악귀처럼 달라 붙어 지 뱃속만 채우려는 인간만 보이냐
노무현 뜯기에 혈안인 민주당의원들이 이재명 찬양하는게
정보 접근성이 훨씬 높아졌음에도, 이번 통상 협의에 대해 자화자찬하고 긍정 평가하는 여론이 높다는거에 놀랐어요. 기사 감사합니다.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ㅠ 잘 읽었습니다.
잘읽었습니다
저도 미사시간에 읽으며, 이 시대에 의인은 몇이나 될까 생각했었습니다
멋진글
악당들에게서 우리나라를 구해주소서!ㅠㅠ
노무현은 넓은 초원을 누비는 사자와 같은 분이라 생각합니다. 어쩌면 이재명이 대한민국 국민 수준에 딱맞는 대통령인 듯
노무현 대통령님같은 지도자는 이제 기대도 안 합니다 필요 없다고 밀어내는 저들에게 너무 아까운 지도자입니다 근데 이재명이라니 그것만 피하고 싶었는데 만족한다니 정말 할 말이 없어요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저들의 꼴을 보며 웃다가도 순간순간 가슴에 돌이 얹어지는 기분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소중한 글 감사합니다.
ㅠㅠㅠㅠㅠ
시대도 많이 변했으니 악인만 조져주소서 /\
탐욕과 거짓이
판을 치고
그 끝판왕이 ㄷㅌㄹ 인 시대
대중은 어째서 악한 권의에만 의지하려 들까요?
그러네요 ㅠ
노무현의 정신이 그립습니다, 희망이 사라진 지금...
좋은 글 고맙습니다.
시대가 변하고 사람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군요. 의인 총량의 법칙
진짜 너무 암담하네요... 잘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