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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의 경고, 평양의 조롱, 서울의 자살골
  • 박주현 칼럼니스트
  • 등록 2025-07-29 04:24:31
  • 수정 2025-08-05 04: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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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전협정일 주적 논란, 이재명 정부의 외교안보 총체적 붕괴

시차로 인해 우리 시각 27일과 28일에 벌어진 남북한과 미국의 정전협정 기념일, 단 하루 반나절 동안 세 도시에서 세 개의 발언이 나왔다. 워싱턴에서는 트럼프의 명의의 성명으로 “미국의 희생과 북한의 야심을 잊지 말라”는 동맹의 경고가, 평양에서는 “북남은 가장 적대적인 두 국가”라는 적의 선언이, 그리고 서울에서는 “한미 훈련 조정을 건의하겠다”는 통일부장관의 굴복 선언이 터져 나왔다. 이 세 장면이 합쳐져 완성된 것은 참사가 아니다. 관세 협상 시한을 코앞에 두고 벌어진, 국가 이성의 완벽한 실종 사건이다.


▲ 사진 : 백악관 홈페이지 캡쳐. 트럼프의 정전기념일 성명 "미국의 희생으로 이뤄진 번영을 잊지마라"


비극의 진앙은 워싱턴, 그중에서도 한국전참전용사기념공원이었다. 불과 열흘 남짓 전, 대한민국의 보훈부 장관 권오을은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북한을 주적이라 표현하기에는 참 애매한 점이 있다”는 경악스러운 인식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는 바로 그 ‘애매한’ 정신 상태를 가진 채로, 미국의 피가 서려 있는 동맹의 성소에 섰다. 동맹의 답변은 즉각적이었고, 모욕적일 만큼 명확했다. 그의 면전에서 더그 콜린스 미 보훈부 장관은 작심한 듯 그의 망언을 정면으로 뭉개버렸다.


“우리는 핵무장한 북한과 김정은 정권의 목표, 즉 남한을 장악하려는 야심을 잊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외교적 수사를 걷어낸 날것의 경고이자, 기억상실에 걸린 동맹을 향한 공개적인 교습이었다. ‘너희가 잊은 적을, 우리는 이렇게 부른다’는. 하지만 이토록 친절한 가르침 앞에서도, 대한민국의 공식적인 대답은 각성이 아닌 더 깊은 침묵을 택하는 것이었다. 우리의 보훈부 장관의 입에선 침략자의 이름, ‘북한’은 끝내 호명되지 않았다.


그 비겁한 공백의 냄새는 즉각 평양의 후각을 자극했다. 김여정은 바로 얼마 후 “북남 관계는 가장 적대적인 두 국가”라며 현실을 못 박았다. 우리가 현실을 부정하는 바로 그 순간, 적은 스스로 ‘적’임을 자처하며 우리의 혼돈을 조롱한 것이다. 나아가 “한미 동맹에 대한 맹신”을 비웃으며, 상대의 약점을 정확히 알고 있는 자만이 구사할 수 있는 정교한 이간계의 칼날을 꽂아 넣었다.


이 노골적인 모욕 앞에서 대한민국 정부는 어떤 답을 내놓았는가.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마치 잘 짜인 각본의 배우처럼, “한미 훈련 조정을 대통령에게 건의하겠다”고 화답했다. 적이 ‘동맹을 버리라’고 압박하자, 스스로 동맹의 심장인 ‘연합 훈련’을 미루겠다는 굴욕적인 다짐을 한 것이다. 이것은 더 이상 외교가 아니다. 적의 악보에 맞춰 추는 항복의 춤이다.


▲ 그래픽 : 박주현


트럼프가 이 희대의 광경을 어떤 눈으로 지켜봤을지는 자명하다. 그는 자신의 ‘안보 무임승차론’을 한국 정부가 온몸으로 증명해 주는 모습에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스스로를 지킬 의지도, 동맹을 지킬 염치도 없는 파트너를 상대로 협상의 기술 따위는 필요 없다. 그저 원하는 모든 것을 청구서에 적어 내밀면 그뿐이다.


72년 전의 희생 앞에서 적의 이름 부르기를 거부하고, 적의 공갈 앞에서 동맹의 가치를 내던진 정부. 이 모든 것이 불과 하루 동안 벌어졌다. 


이재명 정부의 문제는 단순한 ‘저자세 외교’가 아니다. 이는 현실 자체를 부정하는 '정치적 망상(Political Delusion)' 상태에 가깝다. 적은 “내가 너의 적이다”라고 소리치는데, 우리는 “아닐 거야, 대화하면 괜찮을 거야”라고 애써 귀를 막고 있다. 북한의 교활한 현실주의와 급변하는 세계정세를 외면한 위험한 낭만주의. 


‘평화’라는 이름의 신기루에 취해 주적을 잊고, ‘대화'라는 환상에 빠져 동맹을 버리는 자에게 돌아오는 것은 더 비싼 안보와 더 냉혹한 청구서뿐이다. 지금 이재명 정부는 그 파멸의 길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따라 걷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다. 배신이다. 그것도, 과거의 희생과 현재의 위협, 미래의 생존을 모두 배신했다.


이제 곧 도착할 관세 청구서는 시작에 불과하다. 역사는 말한다. 현실을 부정하는 자에게 미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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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 6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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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iinp72025-07-29 12:17:42

    설마 이재명 정부가 고의로 일을 이렇게 만드는 건 아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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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uest2025-07-29 10:50:16

    가슴이 답답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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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inte2025-07-29 10:31:09

    정말 누구를 위한 정부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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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oneycat2025-07-29 09:36:51

    정말 왜 이러는지 저의가 궁금합니다. 미친 정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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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uest2025-07-29 05:40:26

    현 한국 정부의 어리석음이 참 무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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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uest2025-07-29 05:24:07

    이재명정부땜에 나라가 골로가게 생겼네

아페리레
웰컴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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