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구윤철 경제부총리가 인천공항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스콧 베선트 미국 장관이 '긴급 일정'을 이유로 면담을 취소했기 때문이다. 그 '긴급 일정'이라는 게 하필 휴가를 맞은 트럼프 대통령과의 골프 모임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민주당 지지자들의 소셜 미디어는 '미국이 무례하다'는 분노로 들끓었다.
잠깐. 골프가 외교보다 중요하다니, 물론 무례하긴 하다. 하지만 우리도 만만치 않다. 우리는 아예 세계 최강국을 '14번째 자치단체' 취급했었으니까.
나는 90년대 군번이다. 훈련소 마지막 날, 우리를 괴롭히던 조교가 이런 말을 했다. "21세기를 살아가야 할 너희를 20세기 무기로 19세기 방식으로 가르치는 곳이 군대다." 당시엔 꽤 멋진 말이라 생각했지만 지금 보니 우리 정치를 미리 본 예언이 아니었을까 싶다.
요즘 세상은 어떤가. '케데헌'이 넷플릭스에서도 최초로 5주 연속 시청률 1위를 차지한 영화로 기록되었다. 전 세계 수천만 한류 팬들이 한국어를 배우고, 특정 거리에서는 오히려 한국인보다 그 수가 많은 외국인들끼리 한국어로 대화하는 모습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한국 뉴스가 10분도 안 돼 레딧에 번역되어 올라가고, 우리보다 더 뜨거운 토론을 벌이는 시대다.
그런데 정치판만은 예외다. 여전히 80년대 학번들의 전용 놀이터 같다.
중국 싱하이밍 대사에게는 90도 인사에 "셰셰"를 연발하던 이재명 대통령이 "미군은 점령군"이라며 미국 상원의원 앞에서는 "미국이 승인해서 우리가 일본에게 식민지배당했다"고 말한 뉴스가 과연 우리만의 뉴스일까? 이 정도면 외교적 이중인격 아닌가? 중국 앞에서는 굽신거리다가 미국 앞에서는 독립운동가 코스프레라니, 참 바쁘시겠다.
정부 인사들에게 수없이 쏟아진 반미 행적들에 대해선 "나 이제 반미 아니에요"라는 해명만 있을 뿐, 사과는 없다. 왜? 그게 그들의 자랑스러운 이력이자 정체성이니까.
지난 총선에서 89명에서 70여 명으로 줄긴 했지만, 민주당 내 586 출신들의 영향력은 여전히 건재하다. 총리부터 유력 당대표후보까지, 요직은 모두 그 시절 "전사"들이 차지했다. 이른바 '꿘의식'이 민주당을 지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디에도 정의되지 않은 '꿘의식'에 대한 내 사견은 이렇다. 인생의 유일한 업적이 '운동권' 출신이라는 것밖에 없음에도 대단한 특'권' 의식에 사로잡혀 실제 '권'력은 절대 놓지 않는 특정 정치세력과, 그들을 둘러싸고 여전히 구시대적 이념에 매몰된 실제 학생운동 경험과는 거리가 있는 지지 세력까지를 2~30대가 싸잡아 조롱하는 말이다.
이들의 행동 패턴을 관찰해보면 몇 가지 공통점이 발견된다.
첫째, 선택적 무례함의 달인들이다. 자신들의 거친 언사는 "고귀한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투쟁"이고, 상대방의 비판은 "막말"이다. 둘째, 감정 과잉 연기의 귀재들이다. 마치 지금도 최루탄 냄새를 맡고 있는 것처럼 격앙되어 보는 이로 하여금 '혹시 독립운동 중이신가?' 싶게 부담을 전가하는 재주가 있다. 셋째, 이중 잣대의 예술가들이다. 중국은 못 본 체하고, 북한에겐 "같은 민족"이라며 한없이 관대하고, 미국엔 "제국주의"라며 극도로 경계한다. 정작 그들이 말하는 '우리'에는 절반의 다른 진영 국민은 빠져있다는 건 함정.
엊그제 김현 의원이 발의한 법안 이름이 압권이다. '시청각미디어통신위원회'. 마치 80년대 학교 시청각실에서 16mm 필름을 틀던 시절로 돌아간 듯한 작명 센스다. 21세기에 '시청각'과 동의어인 '미디어'를 동시에 쓰면서도 어색함을 못 느끼다니, 이게 바로 '아직도 청춘' 586의 언어 감각이다.
위성락 안보실장은 빈손으로 귀국한 뒤 기자들에게 "유선상으로 최선을 다해 접촉 중"이라고 말했다. 그러면 처음부터 화상회의 하지 그랬나? 그 먼 미국까지 그것도 여러 차례 연세도 있으신데 말이다.
예전엔 한국말 몇 마디 하는 외국인만 TV에 나와도 신기해하던 시절도 있었다. 이제는 다르다. 전 세계가 우리 말을 배우고, 우리 문화를 소비하고, 우리 뉴스에 관심을 갖는다. 그런데 정치만은 여전히 '조용한 아침의 나라' 시절에 머물러 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386이 586이 되어도 여전히 대학가 술집에서 소주잔 기울이며 "제국주의 타도!"를 외치던 그 시절에 살고 있는 건가 싶다. 세상은 넷플릭스 시대인데, 이들만 VHS 테이프를 고집하고 있는 셈이다.
그 조교의 말이 다시 들린다. 21세기를 사는 국민들에게 20세기 운동권이 19세기 이데올로기를 강요하는 현실. 이제 그만 VHS를 내려놓고 스트리밍 시대로 넘어갈 때가 되지 않았을까?
이 기사에 10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저들에게 MZ인 척하는 개딸들이 필요한 것이죠
실제론 5060화짱조 혹은 손가혁 개저들이지만
구림을 젊음이란 포장지로 가려보려는 수작질
공감합니다..
공감합니다
진짜 구구절절 감동적인 명문입니다.
공감합니다
인생의 유일한 업적이 '운동권' 출신...
라떼가 인생의 유일한 업적인 것들이라 우월감에 빠져 어울렁더울렁 사회 생활을 할 줄 아는 것도 아니고 자기들 끼리 마을을 만들어 당겨주고 끌어주는 원시적 공동체에 머물러 있는 사회 지체자들
그 시절에 자기들은 모든 면에서 옳았다는걸 계속 확인받고 싶어하는거 아닐까요? 그래야 이 권력도 계속 유지되구요
언제나 잘 읽히는 칼럼~~!!
잘 읽었습니다. ^^
알바할 때 제일 재수없고 무례한 세대가 딱 저 세대임. 자기보다 낮으면 반말 찍찍 높으면 찍소리 못하고. 얘기하다 생각을 물으면 니 까짓게 뭘 알아 마인드 인간을 제일 많은 세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