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 :박주현>
누군가 내게 “달라진 게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환상이 사라졌다고.
색을 뺀 세상은 흐릿했다.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 정의와 불의, 피해자와 가해자, 모든 것이 단순한 분류로 정리되던 때가 있었으니까.
플라톤의 동굴을 빠져나온 이가 다시 어둠 속으로 들어가기 어려운 것처럼, 맑아진 시야는 되돌릴 수 없다.
골목의 치킨집 사장은 계산기를 두드리며 말했다. "시급이 또 올랐네. 알바생 한 명은 보내야겠어." 그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아, 이런. 선한 의도와 선한 결과 사이에는 이렇게 큰 간극이 있었구나. 그럼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의도만 좋으면 결과는 중요하지 않다고 여전히 믿는가? 아니면 당신도 지금 어떤 안경을 쓰고 있는 건 아닐까? 1980년대 금융자본의 전면화가 없었다면, 19세기 맑스가 예견하지 못한 자본의 유연성도 없었을 것이다.
거울을 보는 순간이 더 충격적이었다. 한때 동지라 믿던 사람들을 보면서 느꼈던 묘한 이질감.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처럼, 우리는 같은 행동을 다르게 해석하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에서 과거의 나를 보았고, 등골이 서늘해졌다. 혁명가인 체 으스대며 내로남불을 부끄럼 없이 해대는 우스꽝스러운 모습.
반대만을 위한 비판은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원전·미국산 소고기·후쿠시마 오염수…… 어떤 이슈 앞에서도 무조건적 반대를 선택하는 논쟁의 관성. 북한의 오염수 방수와 도발에는 침묵하는 이중 기준을 보며 나는 물었다. “정말 이게 정의인가?” 우리가 쏟아내는 비판들이 공허하게 메아리치는 것을 느꼈다. 아 저들은 듣는 법을 잊었구나.
자유의 무게를 느낀 건 그때였다. 국가가 모든 것을 책임져준다는 달콤한 말에 기대고 있을 때는 몰랐다. 내 선택의 권리를 포기하면서까지 얻는 안전함이 얼마나 허약한지. 결국 인생의 무게는 각자가 짊어져야 한다.
왠지 모를 웃음이 돌아왔다. 좌파 시절엔 분노가 채소마냥 썩어가던 시간이었다. 이제는 삶의 아이러니와 유머가 선물로 느껴진다. 모든 것이 투쟁이었고, 정의였고, 분노였는데 한 발짝 떨어져서 보니, 유치하고 무례하고 볼품없다.
경제학 교과서에선 시장이 냉혹하다고 배웠지만, 막상 들여다보니 그보다 복잡했다. 경제는 수만 명의 욕망과 필요가 얽혀 만들어내는 거대한 생물 같았다. 마음만으로는 움직이지 않는, 그러나 마음이 전혀 없지도 않은.
회색지대를 받아들이는 순간이 진짜 전환점이었다. 흑백의 세상에서 벗어나 회색지대를 받아들이는 순간. 사람들이 각자 다른 이유로 살아간다는 걸 인정하는 순간. 그때 비로소 다양성이라는 말이 구호가 아닌 현실로 다가왔다.
책임을 받아들이는 것도 쉽지 않았다. 포퓰리즘의 달콤함을 거부하고, 공짜 점심은 없다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 베네수엘라의 몰락과 그리스의 파산이 그 증거다. 누군가의 주머니에서 나온 돈으로 만들어지는 행복이 얼마나 일시적인지 깨닫는 것.
전 정부를 향해 출범 전부터 퇴진 시위를 벌이던 그들이, 한 달밖에 되지 않은 새 정부에 대해 너무 냉담한 거 아니냐며 항변하고 감싸는 상황에 할 말을 잃었다. 과거 내각 후보를 제대로 검증하라며 목소리를 높이고 그게 국회의 존재 이유라고 까지 하던 이들이, 이제는 감옥에 가도 이상하지 않을 인사들을 총리와 장관 후보로 내세우고, 명백한 ‘갑질’ 행위의 사전적 의미까지 바꾸려 한다. 5년 동안 의원 보좌관을 마흔여섯 명이나 교체하고, 집 안 화장실 변기 수리까지 맡긴 게 갑질이 아니라면, 과연 무엇이 갑질이란 말인가? 스스로에게만 무한한 관대함을 요구하는 그 이중 잣대가 역겹다.
"특활비에 대해 말 바꾼 거 사과한다. 막상 운영해 보니 원활한 국정운영에 꼭 필요하더라." 웃기지도 않는다. 성남시장에 경기도 지사까지 역임했고, 법인카드 사적 사용으로 기소까지 당한 인물이 조직운영에 돈이 필요한 걸 몰랐다는 말을 믿으라고? 오히려 원활한 국정운영을 막고 싶었다는 솔직함은 차마 '이례적으로 많은 탄핵 발의와 관용과 자제로 대화와 타협을 못했다"라고 의회의 책임을 명시한 헌재 판결문의 계엄령 유발을 자인하는 꼴이 될까 두려운 걸까?
안경을 벗는 마지막 단계는 겸손함이다. 도덕적 우월감이라는 마약에서 벗어나는 것. 타인을 쉽게 재단하지 않고, 나 역시 완전하지 않다는 걸 인정하는 것.
안경을 벗으면 세상이 더 복잡해진다. 답이 명확하지 않고, 불편한 진실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그 복잡함 속에서 진짜 자유를 맛본다. 각자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다채로움을 발견한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은 좌파도 우파도 아닌 어딘가다. 그냥 한 명의 인간이 서 있을 뿐이다. 안경을 벗고, 맨눈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 때로는 흐릿하고 때로는 아프지만, 그래도 진짜인 세상을 보는 사람.
그 안경을 다시 쓰라고 한다면, 나는 뭐라고 대답할까?
이 기사에 14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정말 좋은 기사 감사드립니다.
이제 보면 지나간 시간 냉정해 보였던 사람들은 다 이유가 있었던 것 같아요
제 태도 자체가 그렇게 바뀌네요
앞으로도 흑역사는 쌓일테지만 그래도 아 깨달음으로 뭔가 다른 길을 갔으면 합니다
그러게요 세상양심의 척도가 내려앉고
상식이 파괴되고 있네요...
와.. 진짜 공감 백배입니다 ㅜ ㅜ
지금 제 마음을 글로 적어주셨어요
완전공감...
공감 10000000000000%
소중한 글 정말 고맙습니다
공감합니다. 진영을 벗고 개딸을 보니 내가 외치던 정의도 저랬을까 싶어집니다.
"안경을 벗는 마지막 단계는 겸손함이다.
도덕적 우월감이라는 마약에서 벗어나는 것.
타인을 쉽게 재단하지 않고, 나 역시 완전하지 않다는 걸 인정하는 것."
명철하고 멋진글, 감동입니다. 고맙습니다.
"그 안경을 다시 쓰라고 한다면, 나는 뭐라고 대답할까?"
멋진 글 잘 읽었습니다.!!감동적이네요.
너무너무 좋은 글이네요. 제 마음과 같아요 ㅠㅠ 많은 사람이 읽기를..
지금 깨달은 들 늦었죠. 나라 팔아먹는데 온 인생을 바치놓고 끝에 후회해봤자 뭣하겠습니까?
진보라는 환영 속에서 지금의 괴물국가를 탄생시킨 씨앗을 뿌린 게 내가 아닐까 문득 화가 납니다
나의 맹목적 지지가 중국인들의 무상 의료 쇼핑과 세금 없이 100프로 대출로 부동산을 구매해 부동산을 폭등시키고 내 이웃과 가족에게 직접적 피해를입히게 되고 나라를 통채로 듕궈에 바칠 기세의 수령을 탄생시킨 것 같아 자괴감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