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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청산자산부존재증명
  • 김남훈 기자
  • 등록 2025-07-09 09: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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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자산부존재증명


A4용지 몇 장이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거기에는 ‘청산자산부존재 증명’이라는, 갑옷처럼 차갑고 단단한 제목이 박혀 있었다. 아파트 동대표 회의실의 형광등 불빛은 유독 서류의 흰빛을 부각하며 그 위에 인쇄된 활자들을 날카롭게 벼리고 있었다. 한 사람의 생애가, 그 마지막이, 이토록 건조한 단어들로 압축될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현실감을 부여했다.


사연은 간결했다. 노모와 함께 살던 중년의 남성이었다. 사업 실패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생을 등졌다고 했다. 그가 살던 아파트를 처분하고 남은 모든 것을 끌어모아도, 수천만 원의 빚이 허공에 남았다. 자산은 부존재(不存在)했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빚뿐이었다. 그리고 우리 앞에는 그의 마지막 흔적인 150만 원의 미납 관리비가 남았다.


우리는 이제 산 자의 의무를 다해야 했다. 그 150만 원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누군가는 냉정한 숫자를 읊었다. 법적으로 공용관리비에 해당하는 19만 원은 아파트를 새로 낙찰받은 이에게 청구할 수 있다고 했다. 지극히 합리적이고 타당한 계산이었다. 우리는 그런 일을 처리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었다. 야박하다거나, 매정하다는 수식어는 사치였다. 시스템은 그렇게 작동하고, 우리는 그 시스템의 톱니바퀴 중 하나일 뿐이었다.


누구도 감상에 젖지 않았다. 아파트 관리소장님은 담담한 목소리로 후일담을 전했다. 홀로 남겨진 고령의 노모는 다행히 지방에 사는 따님이 모셔갔다고 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는 안도와 함께, 낯선 곳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을 한 노인의 스산한 마음이 먼 풍경처럼 스쳐 갔다. 아들의 마지막 흔적이 남은 집을 뒤로하고 떠나는 길은 어떠했을까. 평생을 기댔을 아들이 남긴 것이 거대한 빚과 남은 이들의 어깨를 짓누르는 상실감뿐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감당하고 있을까.


다음 날 복싱장으로 가기 위해 주차장으로 향했다. 수소차인 넥쏘는 시동을 걸어도 아무런 소음도, 진동도 일으키지 않았다. 미래의 동력으로 움직이는 차는 고요한 침묵으로 나를 현실과 분리시키는 듯했다. 나는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오다 말고, 그가 살았던 동 앞 정자에 차를 세웠다. 10년 가까이 이 아파트에 살면서 나 역시 수없이 저 정자에 앉아 스마트폰을 보거나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곤 했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 얼굴도, 이름도 모른 채 저 정자의 같은 자리에 앉아 다른 시간의 무게를 견디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저기 앉아 어떤 생각을 했을까. 무너져 내리는 사업, 불어나는 빚, 늙은 어머니의 주름진 얼굴을 떠올리며 콘크리트 건물의 어느 창을 무심하게 올려다보았을 것이다. 그의 절망이 얼마나 깊었는지, 그의 고독이 얼마나 무거웠는지 나는 감히 짐작할 수 없다. 그저 같은 공간을 공유했던 익명의 이웃으로서, 그의 마지막 시간을 상상해볼 뿐이다. 그가 내쉬었을 한숨이 아직 정자나무 잎사귀 사이를 떠도는 것만 같았다.


짧은 묵념을 마치고 다시 차를 움직였다. 차창 밖으로 익숙한 아파트 단지의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수많은 창문들, 그 안에서 벌어지고 있을 각자의 희로애락. 우리는 서로의 삶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른 채, 그저 엘리베이터에서 나누는 멋쩍은 목례가 관계의 전부인 도시의 삶. 그러다 어느 날, 한 생명이 부서져 내리고 나서야 우리는 ‘청산자산부존재 증명’이라는 서류를 통해 그의 삶의 단면을 비로소 마주하게 된다.


죽음은 때로 이토록 행정적인 절차로 남는다. 한 인간의 고뇌와 절망, 사랑과 희망은 모두 소거된 채, 채무와 자산의 유무를 증명하는 몇 장의 종이로 귀결된다. 그것이 인생이라고, 누군가는 쉽게 말할지 모른다. 어차피 모든 것은 사라지고 잊히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 덧없음을 알기에, 우리는 지금 발 딛고 서 있는 이 삶의 순간을 더 소중하게 써 내려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서류 몇 장으로 환원될지언정, 그 서류가 작성되기까지의 모든 과정은 분명히 존재했던 실체적인 삶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어제 회의에서 마주한 그 서류는 한 사람의 파산을 증명했지만, 역설적으로 나에게는 삶이라는 장부의 잔고를 다시금 확인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덧없지만, 그렇기에 더욱 소중하게 써야 할 나의 남은 날들을 생각했다. 


*구체적 내용은 프라이버시 관계로 각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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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 2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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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uest2025-07-09 14:37:54

    김남훈 기자님

  • 프로필이미지
    woenfow932025-07-09 10:47:58

    훈프로님 착한 분
    전 다른 생각을 해봅니다
    남겨진 노모는 어떤 생각을 할까
    아들보다 오래 산다는 게 어떤 느낌일까
    장수는 선일까
    마치 천만 년 살 것처럼, 누구나 겪는 죽음을 왜 미리 준비하지 않는 것일까
    여러가지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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