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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 클래식 문외한의 위장술
  • 박주현 칼럼니스트
  • 등록 2025-06-23 20:51:13
  • 수정 2025-08-05 04: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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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밴드 출신이 드라마 현장에서 살아남는 비밀 공개

<사진= 도서 1일 1 클래식 1 기쁨>


클래식 문외한의 위장술


나는 음악을 하지만 대중가요 그 증에서도 밴드출신이다. 그래서 부끄럽지만 클래식은 잘 모른다. 이 문장만으로도 충분히 모순적이지만, 현실은 더 가혹하다. 요즘 드라마 감독들은 너나없이 풀 오케스트라를 요구한다. "음악감독님, 이번엔 좀 클래식하게 해주세요." 그럴 때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중얼거린다. '클래식하게라니, 그게 뭔 소리야.'


결국 나오는 건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음악들이다.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흉내 내려다 실패한 것 같은, 혹은 모차르트를 따라 하려다 포기한 것 같은 애매한 선율들. 그러다 보니 OST는 늘 가요스럽거나 어설프다. 특정 장르를 대표하는 분위기라는 게 있는데, 우리가 만드는 건 늘 그 경계에서 어정쩡하게 떠돈다.


거장의 반열에 오른 한스 짐머도 밴드 출신이라고 자위해보지만, 그는 이미 다른 차원의 존재다. 나 같은 그룹사운드 출신들이 품는 건 결국 열등감이다. 클래식 작곡과 출신들을 마주할 때마다 느끼는 그 미묘한 주눅. 그들은 푸가를 논하고 대위법을 이야기할 때, 나는 코드 진행과 비트를 떠올린다.


그래서 틈만 나면 클래식 소양을 키워보려 한다. 바람 부는 날 청소기를 돌리며 브람스를 틀어놓는다. 활기찬 시작. 하지만 청소가 끝나면 어김없이 소파에 누워 있다. 베토벤의 전원 교향곡이 자장가가 되어 나를 낮잠으로 인도한다. 클래식 교양은 늘 꿈속에서 끝난다.


그러다 발견한 게 『1일 1클래식 1기쁨』이다. 제목부터 범상치 않다. 하루에 클래식 하나씩, 그리고 기쁨까지 덤으로 준다니. 사기꾼들이 쓸 법한 카피인데, 묘하게 솔깃했다.


책은 단순하다. 365일 달력처럼 펼쳐져 있고, 하루에 한 페이지씩 읽으면 된다. 음악 소개글과 유튜브 QR코드가 전부다. 별것 아닌 구성이지만, 나에게는 완벽했다. 컴퓨터를 켜고 커피를 내리는 사이, 오늘의 클래식 한 곡을 듣는다. 벌써 100일째다.


물론 이 정도로 클래식 상식이 생길 리는 만무하다. 나는 여전히 소나타 형식이 뭔지 모르고, 협주곡과 교향곡의 차이도 애매하다. 하지만 뭔가 달라졌다. 내가 잘 다루지 못하는 악기들의 소리에 익숙해졌고, 높기만 하던 클래식의 장벽이 조금씩 낮아지고 있다.


가장 큰 변화는 따로 있다. 어느 날 드라마 작업 중 감독이 "뭔가 바로크하게 해주세요"라고 하자, 나는 대답했다. "아, 바흐 스타일 말씀이시죠?" 그 순간 나는 내가 약간 그럴듯해 보인다는 착각에 빠졌다. 위험한 착각이었지만, 꽤 유쾌했다.


저자가 17일 동안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뒷이야기는 책과 별 상관없다. 중요한 건 이 시리즈가 하나 더 있다는 점이다. 『1일 1클래식 1포옹』. 제목만 봐도 더 감상적일 것 같다. 포옹까지 해주겠다니, 이미 주문했다.


아침 커피 한 잔과 함께하는 클래식 여행. 거창한 교양 쌓기가 아니라 그냥 듣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어차피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클래식은 완전한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적당한 위장의 도구일 뿐이다. 하지만 때로는 위장도 진짜가 된다. 100일째 되는 날, 나는 그런 희망을 품고 있다.


평점: 4.2/5

루틴으로 하다 보면 어느 날 스스로 그럴듯해 보이는 위험한 착각에 빠지게 해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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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 1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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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uest2025-06-24 09:30:13

    초딩 때 아버지의 압박으로 클래식전집을 반 강제로 들었지만 결말은 항상 낮잠 ㅋㅋ. 못 다한 숙제마냥 클래식에 대한 동경이 있었는데 그럴듯해 보이는 위장술 그 위험한 착각에 나도 빠져보고 싶다. 지루한 이 정권을 100일을 즐겁게 견딜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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