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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령과 소울메이트
  • 박주현 칼럼니스트
  • 등록 2025-06-07 22:22:08
  • 수정 2025-08-05 04:2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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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석열의 실패가 이재명에게 준 선물
  • 서로를 증오한 두 남자의 운명적이자 적대적 공생관계

<그래픽 : 박주현>


소울메이트의 아이러니: 윤석열이 만든 이재명의 부활


정치는 때로 가장 재능 있는 소설가도 상상하지 못할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2025년 6월,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일이 바로 그런 경우다. 서로를 죽도록 증오하는 두 남자가 묘하게도 운명의 끈으로 엮여, 한 사람의 몰락이 다른 사람의 부활을 완성시키는 기이한 드라마가 펼쳐졌다.


윤석열이 없었다면 이재명도 없었을 것이다. 반대로 뒤집어도 마찬가지다. 2022년 "역대 최악의 비호감 대선"에서 윤석열이 이재명을 0.73%포인트 차이로 이긴 것도, 2025년 이재명이 대통령이 된 것도 모두 서로 때문이었다. 정치사상 가장 진기한 소울메이트의 탄생이다.


진짜 이유를 가린 부정선거 포장지


사람들은 계엄의 이유로 부정선거 음모론을 첫 번째로 꼽는다. 하지만 벌써 많은 사람들이 잊어버린 사실이 있다. 아마도 그것은 포장지에 불과했을 것이다. 윤석열에게 진짜 절망을 안긴 것은 따로 있었다.


명태균의 컴퓨터에서 발견된 '대통령과의 녹음'이라는 파일명. 이것이야말로 윤석열을 계엄이라는 극단적 선택으로 내몬 진짜 공포였다. 만약 그 파일들이 세상에 공개됐다면 어떻게 됐을까? 공천 개입, 주가 조작 지시, 각종 부패 커넥션이 생생한 음성으로 흘러나오는 순간을 상상해 보라. 그때가 되면 국민의힘 지지자들조차 "이건 도저히 못 봐주겠다"며 등을 돌렸을 것이다.


특활비 전액 삭감도 마찬가지였다. 민주당이 대통령실, 감사원, 검찰, 경찰의 특활비를 싹 잘라버린 것은 단순한 예산 삭감이 아니었다. 그것은 대통령의 은밀한 권력 도구들을 모조리 제거하는 '거세' 작업이었다. 특히 국회 특활비는 그대로 두고 청와대만 삭감한 것은 더욱 치욕적이었다. 이는 윤석열의 자존심에 치명타를 날렸다.


부정선거 음모론은 이 모든 것을 덮기 위한 그럴듯한 포장지였을 뿐이다. 실제로는 명태균 파일의 공포와 권력 도구 박탈의 굴욕감이 윤석열을 막다른 길로 몰아넣었다.


6시간짜리 쿠데타와 '계몽령'이라는 언어 조작


2024년 12월 3일 밤 10시 23분.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는 순간, 한국의 시계는 1979년으로 돌아갔다. 그는 국회를 "범죄자 집단의 소굴"이라 부르며 군대를 보냈다. 하지만 이 21세기판 쿠데타는 고작 6시간 만에 막을 내렸다. 국회의원들이 담장을 넘어 본회의장으로 달려가는 모습은 마치 액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더 기가 막힌 것은 그 다음이었다. 국민의힘 지지자들 사이에서 "계엄령이 아니라 계몽령이다"라는 말이 오갔다. 계엄을 계몽으로 바꾸는 이 언어 마술은 조지 오웰의 『1984』에 나오는 '이중사고'를 연상시킨다. 전쟁은 평화고, 자유는 억압이고, 무지는 힘이듯이, 쿠데타는 계몽이 되었다. 하지만 언어를 조작한다고 현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계엄은 계엄일 뿐이다. 그것을 '계몽'이라는 고결한 단어로 포장하는 순간, 이미 민주주의는 죽은 것이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계엄 실패 직후 윤석열의 반응이었다. 그는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에게 "국회의원부터 잡으라고 했는데"라며 질책하고 "비상계엄을 재선포하면 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발언은 그의 진짜 속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는 정말로 국회의원들을 체포하고 정치적 반대파를 일소하려 했던 것이다.


운명의 반전: 적이 만든 구원


역사의 가장 비극적인 아이러니가 바로 여기에 있다. 윤석열의 계엄 시도가 없었다면, 이재명은 정치적으로 끝장났을 가능성이 컸다. 2025년 5월 1일, 대법원이 이재명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에서 유죄 취지의 파기환송을 결정했다. 파기환송심에서 벌금 100만원 이상이 선고되고 확정됐다면, 이재명은 5년간 피선거권을 잃어 2027년 대선에 출마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법부의 판단은 명확했다. 이재명은 공직선거법을 위반했고,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 마땅했다. 정치생명이 끝나는 것이 법치주의의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런데 윤석열이 계엄이라는 자폭 버튼을 눌러버렸다. 헌법 질서를 파괴하려 한 계엄 시도는 국민들의 분노를 폭발시켰고, 이는 역설적으로 민주당과 이재명에 대한 투표로 이어졌다. 정치적 사망선고를 받을 뻔한 이재명이 오히려 윤석열 덕분에 청와대 주인이 된 것이다.


비극의 연장선: 변호사에서 대법관으로


이재명이 대통령이 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이러니했는데, 최근의 행보는 더욱 씁쓸하다. 그가 자신의 변호사를 대법관 후보자로 언급한 것은 이 모든 상황의 비극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하던 변호사가 이제 대법원에서 법을 해석하게 될 수도 있다는 현실. 이보다 더 완벽한 아이러니가 있을까?


사법부의 독립성과 공정성에 대한 의구심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다. 법치주의라는 것이 결국 권력의 게임에 불과했다는 냉소적 진실이 드러나는 것이다.


제로섬 게임의 진짜 패자


두 사람의 관계를 들여다보면 한국 정치의 민낯이 보인다. 서로를 적폐와 범죄자로 규정하며 상대의 완전한 몰락만을 꿈꾸는 제로섬 게임. 그 게임에서 한 사람이 이기면 다른 사람은 반드시 져야 한다. 타협이나 공존은 애초에 불가능한 구조다.


윤석열은 이재명을 "거대한 범죄집단의 우두머리"라고 불렀고, 이재명은 윤석열을 "독재자"라고 맞받았다. 둘 다 틀린 말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정치가 계속되는 한, 진짜 패자는 따로 있다.


바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며 실망하고 있는 국민들이다. 법치주의는 무너지고, 사법부는 권력의 도구가 되며, 정치는 개인의 생존 게임으로 전락했다. 그 대가는 결국 국민들이 치르고 있다.


민주주의라는 연약한 꽃


2025년 6월, 우리는 민주주의가 얼마나 연약한 꽃인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한 사람의 망상과 절망이 50년 만에 다시 계엄령을 불러왔고, 국회를 점령하려는 시도까지 벌어졌다. 다행히 그 시도는 실패했지만, 진짜 문제는 그 다음에 시작됐다.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어야 할 사람이 대통령이 되고, 자신의 변호사를 대법관으로 앉히려 한다. 이것이 바로 윤석열의 계엄이 만들어낸 최악의 결과다. 하나의 실패가 더 큰 비극을 불러온 것이다.


'계몽령'이라는 말장난으로 쿠데타를 미화하려는 시도들도 마찬가지다. 언어를 조작하고 현실을 왜곡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면역체계를 파괴하는 바이러스와 같다. 이런 바이러스가 확산되면, 언젠가는 정말로 민주주의가 죽을 수도 있다.


윤석열과 이재명. 이 두 남자의 기묘한 운명적 얽힘이 주는 교훈은 분명하다. 정치는 개인의 야심을 실현하는 무대가 아니라 국민의 삶을 책임지는 공간이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공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결국 국민들이 감당해야 한다는 것.


역사는 때로 소설보다 더 기이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하는 정치인들은 한 가지를 기억해야 한다. 진짜 주인공은 따로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주인공들이 더 이상 이런 막장 드라마를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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