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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내란종식이란?
  • 박주현 칼럼니스트
  • 등록 2025-05-20 12:42:11
  • 수정 2025-08-05 04: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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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란이라는 주문, 균형이라는 해독제
  • 잃어버린 균형감각을 찾아서

▲< 그래픽 : 박주현 >


여느때 처럼 커피와 함께 신문을 펼쳤다. 제목만 훑어도 눈이 피로해진다.


내 착각인지 몰라도 아마 민주당이나 이재명후보 입장에선 지난 토론회가 영 맘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또 잠시 잠잠하던 '내란', '내란동조'란 단어들이 민주당발 기사 전면에 쓰이는 걸 보니 말이다. 또다시 조선시대 반정을 앞둔 밤의 비밀 편지들처럼 무겁고 날카로운 단어들이 신문지면을 가득 채웠다. 요즘 정치 뉴스를 보고 있자면 마치 마법 주문을 배우는 기분이다. '내란'이라는 단어를 세 번 외우면 상대방이 마법처럼 사라질 것처럼.


작은 컵을 꺼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목구멍이 바짝 말랐다. 아마도 이런 뉴스를 보는 사람들의 이성도 이렇게 바짝 말라버린 걸까. 아, 아니구나. 이 갈증은 어제 친구와 술을 마신 탓이었다. 대학 동기인 그는 나와 정치적 성향이 정반대다. 그럼에도 우리는 별다름 없이 우정을 유지하고 있다. 비결이 뭐냐고? 서로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는 것. 그게 전부다. 어제도 우리는 "내란"이라는 주제에 대해 격렬하게 토론했다. 나는 술잔을 기울이며 물었다.


"헌재 판결문 읽어봤어?"

그는 고개를 저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난 읽어봤는데, 재미있는 부분이 있더라고."


헌법재판소의 판결문 중 일부를 인용했다. 그 부분은 이랬다. "국회의 다수의석을 차지한 야당이 일방적으로 국회의 권한을 행사하는 일이 거듭됐고, 이는 정부와 국회 사이에 상당한 마찰을 가져왔다." 그리고 "피청구인은 행정부의 수반이자 국가원수로서 야당의 전횡으로 국정이 마비되고 국익이 현저히 저해돼 가고 있다고 인식해 이를 어떻게든 타개해야만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을 것으로 보인다."


친구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는 탄핵 판결문에 이런 내용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고 했다.


술집 창밖으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산을 챙겨 나왔던 게 다행이었다. 비가 올 것을 미리 알았듯이, 어쩌면 정치적 위기도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먹구름이 모여 만들어진 결과일 것이다.


윤석열의 계엄 시도는 명백한 헌법 위반이었고, 그래서 그는 탄핵됐다. 이에 대해선 이견이 없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모든 비극에는 주역만 있는 것이 아니라 조연도 있다. 헌재도 인정한 "야당의 전횡"과 "국정 마비"에 대한 책임은 누구도 묻지 않는다. 마치 두 사람이 싸웠는데 한 명만 처벌받는 상황이다. 어쩌면 가장 핵심적인 질문은 이것일 수도 있다. 내란의 단초를 제공한 주체라 할 수 있는 민주당의 책임은 누가 지는 것인가? 헌재의 판결문만 읽어봐도 상황을 극단으로 몰아간 민주당의 행위를 방치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내란사태의 미완결 아닐까? 그렇다면 내란사태의 완전한 종식은 민주당에도 그 책임을 묻는 것일테다.


균형이란 건 무엇일까? 저울의 양쪽에 똑같은 무게를 올려놓는 것? 아니다. 각자의 잘못에 합당한 책임을 묻는 것이다. 윤석열은 계엄 시도로 헌법을 위반했고, 탄핵당했으며, 재판을 받고있고, 앞으로도 그에 맞는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야당의 전횡"은?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계엄이라는 극단적 선택으로 이어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는 점에 대해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다.


우산을 접고 집으로 들어오며 생각했다. 우리는 단어에 중독되어 있다. '내란'이라는 단어가 주는 짜릿함에, '내란동조'라는 단어가 주는 정의로움의 착각에. 하지만 단어는 현실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 현실은 항상 더 복잡하고 모호하다.


집에 돌아와 뉴스를 켰다. 여전히 내란, 내란동조란 단어가 화면을 떠돌았다. TV를 끄고 창밖을 바라봤다. 빗물이 창문을 타고 흘러내렸다. 한 방울은 곧게, 한 방울은 구불구불. 하지만 결국 모두 같은 땅에 떨어진다.


정치적 적대감이 극에 달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정치적 주문이 아니라 균형이라는 해독제다. 누구도 완전히 옳지 않으며, 누구도 완전히 그르지 않다. 이 당연한 진실을 잊은 채, 그저 더 크게 '내란'을 외칠 수 있는지 겨루고 있다. 한쪽은 계엄을 내란이라 부르며 극형을 요구하고, 다른 쪽은 그 계엄을 유발한 민주당의 책임은 왜 묻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둘 다 틀리지 않았다. 그리고 둘 다 완전히 옳지도 않다.


창문을 닫으며 생각했다. 대화는 누군가를 악마화하는 순간 멈춘다. 그리고 대화가 멈추면 남는 것은 분노뿐이다. '내란'이니 '내란동조'니 하는 단어들이 주문처럼 반복되는 동안, 정작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서로의 말에 귀 기울이는 능력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능력이야말로, 우리가 민주주의라 부르는 이 험난한 여정에서 가장 필요한 나침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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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 2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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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on6er2025-05-20 18:17:13

    어쩌면 진영주의는 그 진영에 대한 애정이 아니라 복잡한 걸 일일이 알아야 하는 번거로움에서 빠져 나오기 위한 핑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중도는 자유롭기도 하지만 매번 중심을 잡고 찾아야 하니 정덕 입장에선 참 귀찮기도 해요
    칼럼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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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uest2025-05-20 14:17:50

    이번에 이재명 정리하면 정상으로 가는 문이 열립니다
    자유민주주의 시민 여러분

아페리레
웰컴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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