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 : 박주현 풍성한 한가위 가족들과 행복하시고 안전운전 하시길
어떤 길은, 단순히 두 장소를 잇는 물리적 경로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우리에게 귀향길이란 그런 길이다. 그것은 아스팔트 위에 그려진 실선이 아니라, 내 기억의 영토를 가로지르는 희미한 흔적에 가깝다. 올해도 당신은 어김없이 그 길 위에 섰을 테고, 당신의 귓가에는 어떤 멜로디가 흐르고 있을 것이다. 그 음악들이 잠시, 시간을 거슬러 흐르는 여섯 척의 배가 되어주기를.
첫 번째 배: 도시의 문을 닫고 나오는 당신에게 검정치마 - 'Hollywood'
서울의 마지막 표지판이 백미러 속으로 아득히 사라지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관객 없는 배우가 된다. 도시의 조명이 꺼지고 내 무대가 막을 내리는 찰나. 검정치마의 목소리는 마치 방금 끝난 연극의 에필로그 같다. ‘할리우드’라는 단어는 성공의 상징이라기보다, 우리가 매일같이 가면을 쓰고 연기해야만 했던 거대한 도시 자체에 대한 은유일 것이다. 경쾌한 멜로디 위로 툭툭 던져지는 그의 음성은, 어깨를 짓누르던 역할의 무게를 털어내고 본래의 나로 돌아가는 길의 허무하고도 홀가분한 공기를 닮았다.
두 번째 배: 어른도 아이도 아닌 당신을 위하여 혁오 - 'TOMBOY'
고속도로는 어른과 아이의 경계가 흐려지는 이상한 공간이다. 핸들을 잡은 나는 분명 도시의 어른이지만, 고향에 가까워질수록 나는 부모의 아이가 되어간다. 혁오의 'TOMBOY'는 바로 그 어중간한 시간을 위한 노래다. "난 부모님의 기대만큼은 아니지만 쓸만한 아들이었고" 같은 가사는, 집으로 향하는 모든 자식들의 마음속 독백과 같다. 화려한 성공담 대신 멋쩍은 안부를 준비하는 우리. 오혁의 무심한 듯한 목소리는 그 불안과 안도감이 뒤섞인 복잡한 심경을 정확히 대변한다. 이 노래는, 아직 아무것도 되지 못한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부지런히 살아온 당신의 시간을 위한 위로다.
세 번째 배: 아이가 된 어른을 위하여 아이유 - '무릎'
톨게이트를 지나 익숙한 동네 이름이 들려오면, 단단했던 마음의 근육이 스르르 풀린다. 지난 몇 달, 혹은 일 년간 당신을 지탱해 온 수많은 ‘어른의 이유’들이 힘을 잃는 시간이다. 아이유의 목소리는 시간을 거스르는 마법사의 주문 같다. 그 나지막한 자장가를 듣고 있으면, 우리는 이미 늙어버린 부모님의 무릎을 베고 누운 어린아이가 된다. 세상의 모든 소음이 멀어지고, 오직 내 머리를 쓰다듬는 따뜻한 온기만이 전부였던 그 시절. 노래는 상기시킨다. 당신은 여전히 누군가의 세상 전부인 아이라는 사실을.
네 번째 배: 부모의 시간 앞에 선 당신에게 김광석 -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막상 집 앞에 다다르면, 우리는 아주 잠깐 망설이게 된다. 문을 열고 마주할 부모님의 시간이, 그 시간의 흔적이 두려워서다. 작년보다 조금 더 느려졌을 걸음, 희끗해졌을 머리카락, 더 깊어졌을 눈가의 주름. 김광석의 노래는, 그 찰나의 망설임 속으로 깊이 들어와 말을 건넨다. 노래 속 ‘곱고 희던 손’이 누구의 손이었는지, ‘세월은 그렇게 흘러’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우리는 부모라는 이름에 가려져 있던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을, 그들이 함께 견뎌온 고단한 시간을 먹먹하게 바라보게 된다.
다섯 번째 배: 변하지 않는 것들의 위로 앞에 김동률 - '귀향'
시동을 끄자 찾아온 정적. 차 문을 열면 도시의 매캐한 공기와는 다른, 흙과 풀이 섞인 냄새가 밀려온다. 김동률의 '귀향'은 바로 그 순간을 위한 배경음악이다. 웅장하게 펼쳐지는 전주는 한 편의 영화처럼 지난 여정을 돌아보게 하고, "나를 반겨주는 건 예전 모습 그대로 변치 않은 풍경들"이라는 가사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건드린다. 세상은 나를 수없이 변하게 만들었지만, 이곳의 낮은 지붕과 좁은 골목은 무심하게 그대로다. 그 변하지 않는 풍경 앞에서 우리는 가장 큰 위로를 얻는다. 잘 돌아왔다고, 말없이 등을 토닥여주는 것만 같다.
여섯 번째 배: 다시, 각자의 강으로 돌아갈 당신에게 델리스파이스 - '챠우챠우'
귀향이라는 짧은 꿈에서 깨어날 시간. 재회의 기쁨은 짧고, 귀환의 길은 언제나 아득하다. 다시 서울로 향하는 차 안에서, 룸미러로 바라본 부모님의 모습이 아지랑이처럼 흐려질 때, 델리스파이스의 몽롱한 사운드가 울려 퍼진다. “들려, 너의 목소리가”라는 가사는 차마 전하지 못한 말들의 메아리 같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지”라는 후렴은 또다시 다음을 기약해야 하는 우리의 미련을 닮았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강으로 돌아간다. 잠시 머물렀던 따뜻한 항구를 뒤로하고, 다시 도시의 차가운 바다를 향해. 어쩌면 인생이란, 이 강들을 부지런히 오가는 것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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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 1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오~ 완전 취향저격 추천곡들이에요,
연휴 내내 팩트파인더 창을 못닫게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글과 함께 하는 음악 여행 멋져요
감사합나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