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X년 X월 X일 새벽 6시, 서울 여의도 모정당 본부 8층 최고위원회의실. 커피 한 잔씩 들고 모여든 최고위원들의 표정이 묘하게 긴장되어 있다. 하지만 그들이 논의하는 건 경제정책도, 민생현안도 아니다. 바로 조금 뒤 시작될 라디오 방송이다.
"오늘 김 선생이 뭘 얘기할까요?" "어제 야당 공격이 좀 약했는데, 혹시 우리한테 뭔가 신호 보내는 건 아닐까요?" "누군가 나가서 분위기 띄워드려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이상한 풍경이다. 대한민국의 거대 정당 최고위원들이 한 유튜버 출신 방송인의 아침 프로그램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며 전전긍긍하고 있다니. 그것도 비판받을까 봐서가 아니라 소외될까 봐서 말이다. 더욱 기이한 건 이런 일이 비밀스럽게 벌어지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이제는 공공연한 일상이 되어버렸다.
지난 몇 년간 우리가 목격한 풍경들을 되짚어보자. 모 정당 의원들이 줄을 서서 그의 방송 출연을 기다리고, 그의 한 마디 한 마디에 당내 분위기가 좌우되며, 심지어 공천 과정에서도 그의 평가가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는 증언들이 심심찮게 들려온다. 일국의 의원들이 자신을 뽑아준 유권자가 아니라 유튜브 청취자들을 향해 절을 하고, 당선증을 자랑한다. 마치 선생님에게 칭찬받으려는 학생들 같은 모습이다. 더 나아가 계엄사태가 벌어진 이후에는 과방위로 불려 나와 확인되지 않은 정보를 증인선서도 없이 전파했다.
한국에서 유튜브를 통해 뉴스를 접하는 비율은 53%로 세계 평균 30%를 훨씬 넘어선다. 놀라운 수치다. 하지만 더 놀라운 건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2022년부터 2023년까지 주요 정치 유튜브 채널 80개를 분석한 결과를 보면 등골이 서늘해진다. 사실 전달 비율은 10%에 못 미치고, 잘못된 정보가 포함될 가능성은 50%에 달한다. 그리고 적대와 증오 표현이 포함된 경우가 85%다.
그런데도 정치·사회 유튜브 채널 시청자의 77%가 해당 채널을 신뢰한다고 답했다. 이게 바로 알고리즘의 마법이다. 사용자가 보고 싶어 하는 것만 골라서 보여주니, 마치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는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 확증편향의 늪에 빠진 시청자들은 점점 더 극단적인 콘텐츠를 원하게 되고, 창작자들은 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더욱 자극적인 내용을 만들어낸다.
악순환의 고리다. 그리고 그 고리의 한복판에 정치인들이 기꺼이 뛰어들었다.
최근 검거된 해킹 조직처럼 온라인 정치도 점조직의 형태를 취한다. 중앙의 통제 없이도 각자의 채널에서 비슷한 메시지를 쏟아내며 여론을 형성한다. 마치 오케스트라 지휘자 없이도 같은 곡을 연주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이건 착각일 뿐이다. 실제로는 보이지 않는 지휘자가 있다. 그리고 그 지휘자는 선출되지 않았다. 국민이 선택한 것도, 당원들이 뽑은 것도 아니다. 단지 구독자가 많고 조회수가 높을 뿐이다.
2019년 총선 분석을 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드러난다. 사회적 쟁점이 된 주요 이슈들을 처음 발굴하고 문제 제기를 한 '이슈 발화자'는 여전히 전통 미디어였다. 온라인 매체들은 이미 의제화된 내용에 대한 찬반 논의나 확산에만 그쳤다. 새로운 이슈를 만들어내는 건 여전히 기존 언론의 몫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온라인 정치의 실체는 무엇인가. 결국 기존 의제를 증폭시키고 왜곡하는 확성기 역할에 그치는 건 아닐까.
더욱 아이러니한 건 이런 현상이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정당화된다는 점이다. "기존 언론의 독점을 깨뜨렸다", "직접 민주주의를 구현했다"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유튜브의 특성상 특정 계층에 편중된 제한적 영향력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정치인들은 마치 이곳이 민심의 바로미터인 양 행동한다. 아침마다 라디오 방송을 체크하고, 유튜브 실시간 댓글 반응을 살피며, 다음 출연 일정을 조율한다. 언제부터 정치인들이 이렇게 초조해졌을까.
문제의 핵심은 권력의 이동이다. 선거로 검증받은 정치인들이 선거와 무관한 인물들에게 휘둘리는 상황. 이게 건전한 민주주의일까.
모정당의 한 중진의원이 털어놓은 증언이 씁쓸하다. "김 선생 방송에 나가는 게 공천받는 것보다 중요해졌어요. 그분이 좋아하지 않으면 당내에서 설 자리가 없어지거든요. 여당을 때리는 걸로는 부족해요. 정확히 그분이 원하는 방식으로, 그분이 원하는 강도로 해야 해요." 이게 2025년 대한민국 정치의 현실이다.
유권자들은 누구를 선택한 걸까. 후보자를 뽑은 건지, 아니면 그 후보자를 조종하는 보이지 않는 손을 선택한 건지 헷갈릴 지경이다.
이번 선거가 전환점이 되기를 바란다. 온라인 유튜브 정치의 한계가 명확히 드러나는 계기 말이다. 어떤 정치 세력이든 이런 점조직에만 의존한다면 그 한계는 분명해질 것이다.
정치는 결국 현실에서 이루어진다. 집값도, 일자리도, 교육도, 의료도 모두 화면 밖 세상의 일이다. 아무리 유튜브에서 열띤 토론을 벌여도 실제 변화는 국회와 정부에서 만들어진다.
유권자들도 깨달아야 한다. 자극적이고 편향된 정보의 홍수 속에서 진짜 중요한 게 무엇인지를. 정치인의 방송 출연 횟수가 아니라 법안 통과 실적을, 댓글 반응이 아니라 정책의 실효성을 봐야 한다는 걸.
무엇보다 왜곡된 권력 구조가 바로잡히길 바란다. 선거로 검증받지 않은 인물이 사실상의 당론을 좌우하고, 정치인들을 줄 세우는 일이 사라지길. 아침 7시 30분에 방송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후 2시에 국회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진짜 권력자가 되길. 정치인들이 라디오 부스가 아니라 국정감사장에서 제 역할을 다하길.
그래야만 우리의 민주주의가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선거가 그 시작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