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약속에 숫자가 필요 없을 때 그것을 믿음이라 부른다. 하지만 정치에서는 다르다. 정치에서 숫자 없는 약속은 그저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마치 구체성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지워버린 듯하다. 재원 마련 계획, 실현 가능성을 판단할 수 있는 그 어떤 수치도 찾아볼 수 없다. 퍼즐에서 가장 중요한 조각들이 모두 사라진 셈이다.
부동산 정책만 봐도 그렇다. 재건축 초과이익 환수제에 대해 이재명은 침묵한다. 대신 정책위의장이 "과도한 이익은 사회 공공을 위해 환수되어야 한다"는 추상적인 말만 늘어놓는다. 마치 모호함이 미덕인 양. 더 놀라운 것은 "시행 후에 부담 정도를 판단해야 할 것"이라는 발언이다. 국민을 정책 실험의 실험체로 보는 듯한 발상. 1950년대 심리학자들이 인간 대상으로 윤리적 한계를 넘나들던 실험을 연상케 한다. 용적률 상향이나 신도시 재정비도 마찬가지다. 얼마나, 어떻게, 언제라는 세부사항은 온데간데없다. 마치 연극 무대에 배경만 있고 배우는 없는 것처럼.
더 아이러니한 것은 돈이 필요한 공약은 넘쳐난다는 점이다. 지역 화폐, 아동수당 18세 확대, 반려동물 지원, 천원 아침밥까지. 펼쳐놓은 선물 목록은 화려한데, 선물을 살 돈이 어디 있는지는 말하지 않는 산타클로스 같은 형국이다. 재원 마련에 대해 묻자 진성준은 당당하게 말한다. "재정 상황이 어려워서 큰 원칙과 방향만 제시했다"고. 마치 식당에서 주문은 했는데 지갑은 두고 왔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더 모순적인 것은 이 와중에 감세를 외친다는 점이다. 돈 쓸 구멍은 늘리고 돈 나올 구멍은 줄이겠다는 마법 같은 이야기.
왜 이런 전략을 쓰는 걸까? 정치권에서는 '전략적 모호성'이라 부른다. 구체적인 수치를 피함으로써 공격받을 포인트를 최소화하는 것. 마치 안개 속에서 싸우는 전사처럼, 자신의 윤곽을 드러내지 않는 전술이다.
이재명의 10대 대선 공약은 "세계를 선도하는 경제 강국", "모두가 잘 사는 나라" 같은 누구도 반대할 수 없는 추상적 표현으로 가득하다. 마치 모든 영화가 "행복한 결말"이라고만 광고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민주당의 이런 태도는 결국 한 가지를 의미한다. 그들은 이번 선거에서 무슨 말을 해도 이길 것이라 확신한다는 것. 또한 유권자들이 공약을 꼼꼼히 읽지 않을 것이라는 냉소적 계산도 깔려 있다.
슬프게도 많은 유권자들은 정말 그렇다. 구체적인 정책보다는 "누가 나에게 더 많은 돈을 줄 것인가"에만 관심이 있다. 마치 복권 당첨 확률만 따지는 사람들처럼. 그리고 "어차피 정치인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냉소주의가 만연하다. 이는 플라톤이 경고했던 민주주의의 위험, 즉 대중영합주의의 현대적 형태라 할 수 있다. 숫자 없는 공약은 진정성과 실현 가능성이 없는 공약이다. 이재명은 이미 자신의 공약이 현실화될 가능성이 없다고 고백한 셈이다. 마치 "여기 쓰여 있는 것 중 아무것도 진실이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역설적 문장과도 같다.
투표하러 가기 전, 잠시 멈춰 생각해보자. 우리는 정말 공허한 약속에 표를 던질 준비가 되어 있는가? 아니면 구체적인 계획과 책임감을 요구할 것인가? 민주주의의 가장 큰 아이러니는 결국 유권자가 원하는 만큼의 정치밖에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