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의 비극에 버금가는 2026년 1월 이란의 참상
지금 이란에서는 경제난과 인권 유린에 저항하는 국민들의 열망이 혁명의 불길로 타오르고 있다. 2022년 '히잡 시위'가 잔혹하게 진압된 이후 잠잠했던 여성과 청년들이 다시금 전국적으로 봉기했다. 한때 친정부 성향이었던 상인들까지 대열에 합류해 "독재자 하메네이에게 죽음을!"을 외치고 있다. 이들에 대한 이란 당국의 대응은 야만적이다. 당국은 외부와의 소통을 끊기 위해 인터넷과 전화를 차단했다. 비공식 집계에 따르면 지난 열흘간의 유혈 진압으로 무려 1만 2천 명(추정)의 국민이 목숨을 잃었으며, 종교경찰과 이슬람혁명수비대(IRGC)는 병원과 가정집까지 들이닥쳐 시위 참여자들을 색출하고 살해하고 있다. 23세의 대학생이 뒤통수에 조준 사격을 당해 사망했다는 소식은 우리 현대사의 광주 5·18을 연상케 할 만큼 참혹하다.
이란 시위 군중의 모습. (사진:연합뉴스)
이란 사태에 기이할만큼 조용한 서구 지식인들, 왜?
하지만 이 비극을 대하는 서구 지식인들의 태도는 기이할 정도로 평온하다. 3년 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 때, 그들은 한목소리로 푸틴의 제국주의적 야욕을 성토하며 민주주의 수호를 외쳤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이 발발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버드와 예일 등 아이비리그 대학가는 정의로운 분노로 가득 찼고, 수많은 스타들과 지식인들은 프로필 사진을 우크라이나 국기 색으로 바꾸며 연대를 표시했다.
당시 젤렌스키에게 자신의 오스카 트로피를 건네며 지지를 표명했던 배우 숀 펜, 가자지구의 인도적 위기를 '집단학살'이라 비판했던 안젤리나 졸리와 그레타 툰베리, 러시아의 침공을 '인류 진보를 되돌리는 행위'라 규정했던 유발 하라리까지. 가자와 우크라이나의 비극에 그토록 민감하게 반응하던 이들의 목소리가 이란 정권의 사법적 도살 앞에서는 유독 고요하다. 독재 정권이 여성의 신체 자유를 억압하고 보편적 가치를 짓밟는 반문명적 행태가 일상화되었음에도, 평소 모든 사회 이슈에 목소리를 내던 서구의 ‘워크(Woke)’ 지식인들은 이상할 정도로 입을 닫고 있다.
팔레스타인 문제에는 목소리를 높이지만 이란 사태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활동가, 그레타 툰베리를 비판하는 이미지 (출처: X)
안젤리나 졸리, 하비에르 바르뎀 등 평소 인권 문제에 발언했던 할리우드 스타들의 침묵을 조롱하는 이미지.(출처: X)
서구 좌파의 진영논리가 초래한 역겨운 모순
이 기이한 침묵의 배경에는 ‘진영 논리’라는 거대한 족쇄가 채워져 있다. 서구 진보 진영에게 이란 독재 정권을 비판하는 것은 쉽게 말해 '남는 게 없는 장사'다. 그들에게 러시아는 '백인 독재자가 이끄는 제국주의'라는 명확한 타격 지점이 있고, 이스라엘은 '서방 권력의 지원을 받는 절대 강자'라는 비판의 명분이 있다. 그러나 이란은 다르다. 그들에게 이란은 실체와 무관하게 미국이라는 거대 패권에 맞서는 '비서구 저항 세력'이라는 프레임 속에 존재한다. 그들은 또한 이란 정권을 비판하는 것이 자칫 자신들이 혐오하는 '제국주의 미국'의 정책에 호응하거나, 이슬람 혐오(Islamophobia)를 조장하는 '반진보적 행위'로 비칠까 봐 두려워한다.
1월 14일자 텔레그래프의 기사. 알리스테어 히스 편집장이 서구 진보 좌파 지식인들의 위선을 비판했다. (사진: 텔레그래프)
서구 내부에서도 이러한 위선에 대한 자성이 터져 나오고 있다. 14일, 영국 텔레그래프의 편집장 알리스테어 히스는 칼럼을 통해 "이란 사태에 대한 가식적인 예술가들(Luvvies)의 이중잣대는 구역질이 난다"고 직격했다. 그는 "당신이 그들이 원하는 '올바른 종류의 피해자'가 아니라면, 그 잘난 지식인들은 당신에게 티끌만큼의 관심도 주지 않는다"며, 반서방·반이스라엘 성향의 정권이 저지르는 만행은 그들에 의해 미화되거나 묵인되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란을 외면하는 인권과 평화?
밴드 '파이브 포 파이팅'의 존 온드라직 역시 월스트리트저널(WSJ) 기고문에서 날카로운 일침을 가했다. 평소 우크라이나 지원 콘서트를 여는 등 적극적인 인권 활동을 해온 그는 "팔레스타인 해방(Free Palestine)을 외치던 이들이 이란의 해방에는 눈곱만큼의 관심도 없다는 사실을 도저히 모른 척할 수 없다"며, 이 모든 분노가 애초에 평화나 인권을 위한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고 한탄했다.
프랑스 철학자 파스칼 브뤼크네르는 이러한 위선의 뿌리를 '서구 지식인의 자기혐오'에서 찾는다. 서구 지식인들이 과거 식민 시대의 죄책감에 함몰된 나머지, 특정 집단(이슬람권 등)을 '영원한 피해자'로 설정해두고 그들 내부의 가혹한 인권 침해조차 '그들만의 문화'로 포장한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이란 여성의 생명권을 서구 여성의 인권보다 낮게 보는 또 다른 형태의 인종주의이자 오만이다.
선택적 분노는 위선이며 도덕적 파산
온드라직의 지적처럼, 서구 진보의 모순된 태도는 그들이 진정으로 추구하는 것이 ‘보편적 인권’ 같은 숭고한 가치가 아니었음을 증명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자유의 토대인 서구 문명을 공격하는 데만 혈안이 되어, 정작 그 가치가 절실한 이란 여성들의 비명은 외면하고 있다.
'지식인'이라면, 아니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인간'이라면 가해자가 누구인지 따져가며 분노하기를 선택해서는 안 된다. 인권을 진영 논리의 도구로 전락시킨 그들의 침묵은 도덕적 파산과 다름없다. 서구 지식인들이 이 비겁한 침묵을 깨지 않는다면, 그들이 외쳐온 정의는 오직 자신들의 평판을 지키기 위한 위선으로 기록될 것이다.

김선 논설위원 다른 기사 보기
이 기사에 3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서구 진보들이 한국진보들 에게 잘 배운것 같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