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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의 ‘줄리아’가 건네는 새해 인사 <디펜딩 유어 라이프>
  • 박주현 칼럼니스트
  • 등록 2026-01-03 11:33:17
  • 수정 2026-01-03 11:51:41

  • 90년대의 낙천주의가 2026년의 불안에게 건네는, 다정하고도 단호한 응원가

영화 갈무리 :  Defending your life, 한국제목-영혼의 사랑새해의 첫 페이지를 넘기는 행위는 언제나 기이한 부채감을 동반한다. 우리는 대개 작심삼일로 끝날 촘촘한 계획표를 짜며 스스로를 검열하고, 작년보다 더 ‘생산적인’ 인간이 되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2026년이라는 새로운 시간의 문턱에서 내가 꺼내 든 것은 치밀한 계획표가 아니라, 1991년이라는 까마득한 시간 속에 박제된 낡은 영화 한 편이었다. 알버트 브룩스의 'Defending your life' 이다.


이 영화는 국내 개봉 당시 쌩뚱맞게도 <영혼의 사랑>이라는 제목이 붙었다. 아마도 사후 세계에서 남녀가 만나니 대충 로맨틱한 눈물이라도 짜내는 영화겠거니 싶었던 수입사의 안이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덕분에 관객들은 최루성 멜로를 기대하고 극장에 들어갔다가, "아무리 먹어도 살 안 찌는 사후 세계 맛집" 이야기에 당황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헐거운 제목은 영화가 숨겨놓은 진짜 위트를 가려버린다. 원제 그대로 ‘당신의 삶을 변호(Defend)하라’는 이 영화의 본질은, 죽음 이후에 펼쳐지는 아주 기발하고 유쾌한 ‘인생 결산 면접’이기 때문이다.


영화 갈무리 :  Defending your life, 한국제목-영혼의 사랑이 영화가 그리는 사후 세계는 단테의 신곡처럼 장엄하지도, 종교적인 엄숙함에 짓눌려 있지도 않다. ‘저지먼트 시티’라 불리는 그곳은 마치 90년대 미국의 평화로운 교외 리조트를 닮았다. 아무리 먹어도 살이 찌지 않고, 호텔 서비스는 완벽하며, 사람들은 화사한 옷을 입고 산책을 즐긴다. 하지만 이 안락함 뒤에는 영혼의 운명을 결정지을 서늘한 재판이 기다리고 있다.


재판의 풍경은 묘하다. 검사와 변호사는 영혼이 살아생전 겪었던 결정적인 순간들을 대형 스크린에 띄워놓고 공방을 벌인다. 그런데 심판관들이 집요하게 파고드는 지점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착함’이나 ‘성공’이 아니다. 그들은 묻는다. “당신은 그때 왜 망설였는가? 왜 두려움 때문에 진심을 숨겼는가? 왜 실패가 무서워 도전하지 않았는가?”


영화는 기발한 설정 하나를 던진다. 인간이 뇌의 능력을 고작 3~5%밖에 쓰지 못하는 이유는 지능의 문제가 아니라 ‘공포’ 때문이라는 것이다. 두려움은 우리의 사고를 마비시키고 영혼을 위축시킨다. 공포는 우리가 삶에 지불하는 일종의 ‘세금’이며, 그 세금을 많이 내는 영혼일수록 다음 단계로 진화하지 못한 채 다시 지구로 돌아가 같은 시험을 반복해야 한다.


영화 갈무리 :  Defending your life, 한국제목-영혼의 사랑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하는 것은 젊은 시절 메릴 스트립의 모습이다. 그녀가 연기한 ‘줄리아’는 이 재판의 가장 빛나는 주인공이다. 그녀의 웃음은 맑고 청량하다. 그것은 단순히 성격이 낙천적이어서가 아니라, 매 순간 공포와 정면으로 맞서온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영혼의 훈장 같은 것이다. 줄리아를 보고 있으면 용기란 대단한 영웅주의가 아니라, 두렵지만 한 걸음 더 내딛는 사소한 태도들의 총합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90년대 영화 특유의 긍정적이고 다정한 분위기는 이 묵직한 철학적 질문을 부드러운 새해의 산들바람처럼 독자에게 전달한다.


새해를 시작하는 우리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덕목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더 많은 숫자가 적힌 통장이나 화려한 경력이 아니라,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망설이는 수많은 도전들, 타인의 시선이 두려워 접어두었던 꿈들 앞에서 이 영화는 다정하게 어깨를 다독인다. “괜찮아, 조금 더 너의 인생을 방어(Defend)해봐. 그 용기가 너를 더 좋은 곳으로 데려다줄 거야.”


민망하게도 이 영화는 30년이 넘은 고전이라 요즘의 화려한 OTT 서비스 목록에서 쉽게 찾아내기가 그리 녹록지 않다. 귀한 보물을 소개해놓고 정작 찾는 방법을 알려주지 못하는 주인처럼 송구한 마음이 앞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굳이 권하는 이유는, 2026년이라는 거친 파도를 넘어야 할 우리에게 ‘용기’보다 더 아름다운 새해 선물은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용기란 공포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공포에도 불구하고 행하는 것이다. 훗날 우리의 2026년을 스크린에 띄웠을 때, 우리가 두려움 때문에 뒤로 물러선 장면보다 서툴러도 도전하며 환하게 웃는 장면이 더 많기를 바란다. 찾기 힘든 영화를 권하는 결례를 무릅쓸 만큼, 당신의 새해가 줄리아의 웃음처럼 공포를 넘어선 용기로 반짝이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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