롭 라이너 감독 부부 [EPA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거실 소파 위, 두 덩어리의 털뭉치가 나른하게 하품을 한다. 나를 집사의 길로 안내한 ‘해리’와 ‘샐리’다. 녀석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지어준 먼 나라의 할아버지가 지난 15일, 어떤 끔찍한 최후를 맞았는지 알지 못한다. 그저 따뜻한 햇살 아래서 서로의 털을 골라주며 세상은 여전히 평온하다고 믿고 있을 뿐이다. 그 평화로운 풍경이 오늘은 유독 목구멍에 가시처럼 걸린다.
로맨틱 코미디의 바이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를 연출한 거장 롭 라이너 감독 부부가 LA 자택에서 살해당했다는 비보가 전해졌다. 범인은 다름 아닌 그들의 친아들, 닉 라이너였다.
롭 라이너. 그는 우리에게 "남녀 사이에 친구가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사랑이 시작되는 가장 설레는 순간을 선물했던 사람이다. 영화 속 해리와 샐리는 12년의 엇갈림 끝에 마침내 서로를 끌어안았고, 우리는 그 모습을 보며 "나도 저런 사랑을 하고 싶다"고 꿈꿨다. 내가 이 작은 생명들에게 그 이름을 붙여준 것도, 녀석들의 삶이 그 영화처럼 마냥 사랑스럽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현실의 엔딩 크레딧은 너무나 잔혹하게 올라갔다. 이 비극이 더욱 뼈아픈 건, 라이너 부부가 아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부모였기 때문이다.
닉이 10대 시절부터 약물 중독으로 나락을 헤맬 때, 부모는 아들을 쫓아내거나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아들의 아픈 경험을 시나리오로 옮겨 <비잉 찰리>라는 영화를 함께 만들었다. 그것은 영화라기보다, 예술이라는 도구를 빌려 아들을 세상으로 다시 끌어올리려는 부모의 필사적인 밧줄이었다. "우리는 너를 이해하고 싶다.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카메라 렌즈 너머로 부부는 그렇게 외쳤을 것이다.
하지만 약물과 증오에 잠식된 아들의 영혼에는 그 목소리가 닿지 않았던 모양이다. 부모가 내민 구원의 밧줄은, 결국 아들의 손에 들린 흉기가 되어 돌아왔다. 사랑으로 쓴 시나리오가 피로 쓰인 비극으로 덮이는 순간이었다.
뉴스를 보고 난 뒤, 나는 괜히 자고 있는 고양이 해리의 등을 쓰다듬었다. 손끝에 닿는 체온이 따뜻해서 가슴이 아려왔다. 영화 속 샐리는 해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네가 누군가와 남은 인생을 같이 보낼 거라는 걸 깨달았을 때, 너는 그 남은 인생이 하루라도 빨리 시작되길 바랄 거야."
라이너 부부는 아들과 함께할 '남은 인생'을 그토록 간절히 바랐을 텐데, 그 남은 인생은 너무나 허무하게 끊겨버렸다. 스크린 속의 해리와 샐리는 영원히 늙지 않고 뉴욕의 거리를 걷겠지만, 그들을 만든 창조주는 자신의 피조물인 아들에게 살해당했다.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지만, 어떤 인생은 예술보다 훨씬 더 잔인하게 끝이 난다.
내 고양이 해리가 잠꼬대를 하며 샐리의 품을 파고든다. 녀석들은 여전히 건강하고 예쁘다. 그래서 더 슬프다. 세상의 모든 해피엔딩이 이 작은 털뭉치들에게만 남아있는 것 같아서. 저 멀리 LA의 차가운 부검실에 누워있을 노부부에게, 오늘은 작별 인사 대신 내 고양이들의 따뜻한 그루밍 소리를 들려주고 싶다. 부디 그곳에서는 고통 없는 사랑만 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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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현 칼럼니스트 다른 기사 보기
이 기사에 2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어렸을 때 비디오테이프를 닳고 닳을때까지 보면서 좋아했던 영화였습니다.
끝나는게 아쉬워서 다시 보면 또 아쉽고 아쉬운.
한번 다시 돌려봐야 되겠네요.
글과 소식 감사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그곳에서는 행복만 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