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국민의힘, 대통령실에 특활비 증액 항의서한 전달 (서울=연합뉴스) 한상균 기자>
텔레비전 화면 속 국회의원들의 표정을 보는 순간, 나는 리모컨을 던지고 싶었다. 대통령실 앞에서 벌어진 광경이 한 가지 확신을 안겨주었다. 우리는 정치적 연극의 시대를 살고 있다.
국민의힘 의원들이 특활비 문제로 항의하러 갔다. 손에는 항의서, 얼굴에는 비장함이 서려 있었다. 적어도 카메라 앞에서만큼은. 그런데 정무수석 우상호가 나타나자 모든 게 바뀌었다.
우상호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마치 어린아이의 장난을 지켜보는 어른의 표정이었다. 국민의힘 의원들은 몇 마디 항의 아닌 항의를 늘어놓더니 서류를 건네고는 그렇게 헤어졌다. 항의는 시들어가는 꽃잎처럼 힘없이 바람에 날렸고, 남은 건 어색한 미소뿐이었다.
한국 정치의 비밀이 드러났다. 여야는 카메라 앞에서만 싸운다. 이재명 정부가 우상호를 정무수석으로 임명한 이유가 이제야 보인다. 그에 대한 솔직한 좌파 진영의 평가는 정무수석감은 아니라지만, 여야를 막론하고 모든 의원들과 두루두루 친하다. 야당 의원들을 '살살 달래는' 용도로 안성맞춤인 인물이었다.
보수 지지층들의 반응은 뻔했다. "저따위로 항의할 거면 뭐 하러 갔나"라는 탄식이 쏟아졌다. 웰빙 정당이라는 별명이 이제야 제대로 된 뜻을 찾았다. 몸과 마음이 편안한 정치 말이다.
더 아이러니한 건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벌어진 대조적 장면이다. 가덕도 신공항 건설을 반대하는 시민이 1인 시위를 하다가 경찰 서너 명에게 짐짝처럼 끌려 나갔다. 국회의원들의 '항의'는 훈훈한 담소로 끝났지만, 일반 시민의 항의는 물리적 제압으로 마무리되었다.
민주당의 반응을 보면 계산이 적중했음을 알 수 있다. "뭘 사과하라는 건지 모르겠다"며 뻔뻔함을 드러냈다. 새 정부 특활비 배정을 사과하라는 것인지, 전 정권 특활비 삭감을 사과하라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식이다.
후안무치의 극치다. 야당 시절 윤석열 정부 특활비에 대해 마구잡이로 의혹을 제기하며 증빙하라고 압박했던 그들이다. 준비하지 못하면 "빼돌린 것"이라는 프레임을 씌웠다. 기준은 오락가락하고, 잣대는 이중적이다. 그런데도 국민의힘의 '항의'는 훈훈한 담소로 끝났다. 이 얼마나 완벽한 윈-윈 게임인가.
보수를 자처한 네티즌의 지적이 뼈아프다. "보수 지지자는 조용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우파 의견을 대변하는 국회의원도, 실어주는 언론도 없다. 그나마 소신 있게 목소리를 내던 유튜버들이 탄압당해도 신경조차 쓰지 않는 국민의힘 정치인들에게 아예 질려버렸다."
이번 인사청문회에서 진짜로 싸운 국힘의원이 몇 명이나 있었나. 이런 상황에서 국민들이 생업까지 포기하며 나라를 살리겠다고 나설 이유가 있겠는가.
그런데 잠깐, 정말 세상이 바뀐 걸까? 아니면 우리가 보던 게 원래 환상이었던 걸까?
무한공항 참사 유족들은 여전히 대통령실 앞에서 항의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 정부는 별로 관심이 없다. 야당 시절 "정권만 잡으면 모든 걸 해결하겠다"던 약속은 어디로 갔을까.
정치는 연극이 아니다. 적어도 그래서는 안 된다. 하지만 우리가 목격한 건 완벽한 정치 연극이었다. 무대 위에서는 대립하고, 무대 뒤에서는 웃으며 악수하는. 관객들만 진짜인 줄 알고 박수치거나 야유를 보낸다.
문제는 연극이 계속되는 동안 진짜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국민의힘이 계속 이런 식으로 간다면, 정당으로서 존재 가치를 잃을 것이다. 지지층들은 이미 질려가고 있고, 진짜 야당 역할을 기대하기 어렵다.
훈훈한 항의 현장. 이보다 더 아이러니한 표현이 있을까. 정치적 무력감에는 온도가 있다. 그리고 그 온도는 미지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