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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한 배드뱅크인가?
  • 박주현 칼럼리스트
  • 등록 2025-06-08 22:50:04
  • 수정 2025-06-08 23:2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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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빌리은행에서 배드뱅크까지
  • 과연 채무자를 위한 정책일까?


마술사는 관객의 시선을 돌리는 동안 진짜 속임수를 펼친다. 2015년 8월 27일, 서울시민청에서 화려하게 막을 올린 주빌리은행을 되돌아보며 나는 이 오래된 마술의 원리를 떠올렸다. 착한 금융이라는 현란한 수사, 채무탕감이라는 숭고한 명분, 그 뒤로 조용히 손을 뻗는 진짜 수혜자들의 그림자.

10년이 지난 지금, 이재명 정부는 코로나 배드뱅크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같은 마술사가 무대에 다시 올라 새로운 레퍼토리를 선보인다고 해야 할까. 관객석의 박수소리는 여전히 크지만, 무대 뒤편에서는 여전히 같은 거래가 오가고 있다.

5%의 마법: 죽은 돈이 살아나는 순간

주빌리은행의 비즈니스 모델은 언뜻 단순해 보였다. 부실채권을 원금의 5%에 사들여 채무자에게 7%만 갚으면 빚을 없애준다는 것. 하지만 여기서 첫 번째 의문이 생긴다. 10년 넘게 한 푼도 갚지 못했던 사람이 갑자기 어디서 7%를 구해올까.

주빌리은행 관계자는 솔직했다. "대부분의 채무자들은 빚을 갚고 싶어하지만 갚을 여력이 되지 않는다." 이 말을 뒤집어보자. 갚을 여력이 없어서 10년간 연체한 사람들이 주빌리은행 덕분에 갑자기 돈이 생긴다고? 이는 마치 물에 빠진 사람에게 수영을 가르치겠다는 것과 같은 발상이다.

진짜 마법은 따로 있었다. 대부업체들이 기꺼이 채권을 넘긴 이유를 보면 답이 나온다. 소멸시효가 지나 법적으로 추심 불가능한 '죽은 채권'들을 원금의 5%라는 가격으로 처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0원이었던 것이 갑자기 5%의 가치를 갖게 된 순간, 마법이 완성됐다.

한화증권이 10억원 상당의 특수채권을 기부했을 때, 언론은 '아름다운 동행'이라고 칭송했다. 하지만 회계 관점에서 보면 이는 손실처리를 깔끔하게 마무리하면서 동시에 사회공헌 포인트까지 얻는 일석이조의 거래였다. 기부금 영수증과 언론 보도는 덤이었다.

새출발기금의 30조원 코미디

윤석열 정부의 새출발기금은 주빌리은행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30조원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로 포장했지만, 실상은 더욱 코믹했다. 2023년 8월 기준 집행률 3%. 목표액 대비 29조원이 공중에 떠 있는 상황이었다.

문제는 절차의 복잡함이 아니었다. 근본적으로 이 제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실제로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 사이에 괴리가 있었던 것이다. 진짜 어려운 사람일수록 복잡한 서류작업을 감당하기 어렵고, 1년 넘게 기다릴 여유도 없다.

은행들의 반발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민간 상장기업 주주의 재산권 침해"라며 펄펄 뛰었는데, 이들이 평소 고객들에게 보인 태도와는 사뭇 다른 원칙론이었다. 연체이자 20% 넘게 받으면서 재산권을 주장할 때는 언제고, 정부가 개입하려 하니까 갑자기 자유시장경제를 들먹인다.

배드뱅크, 세 번째 막이 오르다

이제 이재명 정부가 배드뱅크라는 새로운 카드를 꺼내들었다. 47조4천억원 규모의 코로나 대출을 처리하겠다는 웅장한 계획이다. 금융당국은 "새출발기금의 경험을 반영해 더 효율적으로 설계할 것"이라고 했지만, 과연 그 경험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3% 집행률이라는 참담한 성적표에서 얻은 교훈이 더 효율적인 부실채권 처리 시스템 구축이라면, 이는 마치 시험에서 0점 맞은 학생이 다음번에는 더 빠르게 0점을 맞겠다고 다짐하는 것과 같다.

배드뱅크의 진짜 의미는 다른 곳에 있다. 은행들이 보유한 부실채권을 공적 자금으로 인수해주는 시스템. 표면적으로는 서민구제지만, 실제로는 금융기관의 대차대조표 정리를 도와주는 장치다.

한국자산관리공사의 부채비율이 145%에서 213%로 치솟은 것도 우연이 아니다. 공적 기관이 민간의 리스크를 떠안는 구조가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호텔 캘리포니아의 경제학

Eagles의 명곡 'Hotel California'에는 이런 가사가 있다. "You can check out any time you like, but you can never leave." 주빌리은행부터 배드뱅크까지 이어지는 이 실험들을 보면서 이 노래가 계속 맴돈다.

채무자들은 언제든 체크아웃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만, 실제로는 절대 떠날 수 없는 호텔에 갇혀 있다. 7% 탕감을 받았다 해도 근본적인 경제적 취약성은 그대로다. 새로운 빚을 지지 않을 이유가 없다. 시스템은 이들이 계속 머물러야 작동하기 때문이다.

진짜 수혜자들은 따로 있다. 회수 불가능한 부실채권을 처분할 수 있게 된 금융기관들, 사회공헌 이미지를 얻은 대기업들, 그리고 선의의 정책이라는 명분으로 정치적 자본을 축적한 정치인들.

주빌리은행 제윤경 상임이사가 "어려운 사람에게는 돈을 빌려주면 안 된다"고 했을 때는 진실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 진실을 실천하려면 전체 금융시스템의 수익구조를 바꿔야 한다. 그런데 주빌리은행을 비롯한 모든 후속 정책들은 기존 구조를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미봉책만 제시했다.

마술사의 마지막 트릭

이재명 대통령의 지적은 정확했다. "다른 나라는 국가 부채를 감수하며 코로나19 피해를 책임졌지만 우리나라는 돈을 빌려주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하지만 배드뱅크라는 해법도 결국 같은 패러다임 안에서 맴도는 것 아닌가.

진짜 문제는 빚을 탕감해주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빚을 지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근본적 변화는 기존 이익구조를 건드리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부담스럽다. 대신 일회성 이벤트로 여론의 관심을 돌리는 것이 훨씬 안전하다.

주빌리은행이 '은행'이라는 이름을 썼다가 은행법 위반 논란에 휘말린 것은 상징적이다. 법적 검토도 제대로 하지 않고 급조한 정책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다.

포장지를 벗겨내면

마술의 비밀을 알고 나면 더 이상 마법 같지 않다. 주빌리은행부터 배드뱅크까지, 이 모든 실험들의 공통점은 명확하다. 선의라는 포장지로 감싼 채 기존 시스템의 수혜자들에게 새로운 이익의 통로를 열어주는 것.

시민들의 후원금과 세금으로 대부업체의 부실채권을 처리해주고, 공적 자금으로 은행의 대차대조표를 깨끗하게 만들어준다. 그 과정에서 몇몇 채무자들이 혜택을 받는 것은 부수적 효과일 뿐이다.

많은 분들이 모럴해저드나 국가부채증가에 대한 두려움을 먼저 드러내지만, 오히려 정말 채무자에게 도움이 되는 정책인가를 따져보는 게 먼저가 아닐까?

진정한 변화를 원한다면 포장지부터 벗겨내야 한다. 누가 비용을 부담하고 누가 혜택을 받는지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그래야만 마술이 아닌 진짜 정책을 만들 수 있다.

누군가는 박수소리와 환호를 보낼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박수를 멈추고 무대 뒤를 들여다볼 때가 됐다. 마술사의 손끝에서 정말로 무엇이 오가는지 확인해야 한다. 그것이 진짜 관객의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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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 3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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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uest2025-06-08 23:57:37

    하늘이서여 땅이시여 이 나라를 어찌 하오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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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uest2025-06-08 23:51:34

    맘이 아픕니다. 하는 일마다 의심을 해야 진실을 마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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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uest2025-06-08 23:17:25

    공감가는 글입니다. 집권 초기 지지율 때문이라도 눈가리고 아웅하는 선심성 정책을 많이 내놓을 거라 생각합니다. 잘 지켜보긴 하겠지만 과연 알고 있다고 해서 막을 수 있을지 그것이 두렵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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