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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억원 담당제" vs "5호 담당제"
  • 박주현 칼럼니스트
  • 등록 2025-06-01 11:10:42
  • 수정 2025-08-05 04:2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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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신에게 몰린 관심을 서로의 감시로 돌리는
  • 북한보다 더 정교한. 강제가 아닌 자발적 상호감시
  • 신뢰를 5억에 팔아버리는 위험한 독재발상

<그래픽 : 박주현>


이재명이 꺼낸 감시사회 판도라의 상자


이재명이 범죄 제보자에게 5억원을 주겠다고 했다. 나는 그 순간 등골이 서늘했다. 이건 돈 얘기가 아니다. 내 옆집 아저씨가 어제까지 웃으며 인사를 나누던 사람이 오늘 갑자기 나를 감시하는 눈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그 눈에는 이제 5억원이라는 숫자가 깜빡인다.


고자질쟁이가 된 어른들


어린 시절 동네에는 항상 한 명쯤 있었다. 다른 아이들이 뭘 하는지 일일이 부모에게 고자질하는 아이. 그 아이가 나타나면 놀이는 끝났다. 자연스럽던 웃음이 어색해졌다. 우리는 그런 아이를 피했다. 함께 놀지 않았다. 신뢰가 깨진 관계는 복구되지 않는다는 걸 아이들도 본능적으로 안다. 그런데 이제 어른들이 그런 아이가 되자고 한다. 국가가 나서서 5억원이라는 당근을 흔들며.


슈타지의 그림자


베를린 장벽이 있던 시절, 동독에는 슈타지라는 비밀경찰이 있었다. 그들은 시민 180명당 1명꼴로 정보원을 심어놓았다. 이웃이 이웃을 감시했다. 연인이 연인을 밀고했다. 가족이 가족을 팔았다.

한 사람의 감시 기록이 1.5미터 두께였다고 한다. A4 용지로 치면 3000장이 넘는다. 그 종이 더미 속에는 "오늘 누구와 만났는지,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심지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까지 빼곡히 적혀 있었다.

독일 통일 후 사람들은 자신의 파일을 열어봤다. 그리고 절망했다. 20년간 함께 살던 남편이, 매일 안부를 묻던 친구가, 심지어 자신의 아이까지도 자신을 감시하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오억원이 만드는 풍경


5억원. 서울 변두리 아파트 한 채 값이다. 그 돈이 눈앞에 펄럭이면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

"아, 저 사람 주차 위반했네. 신고해볼까?" "어? 저 상점에서 현금영수증 안 주는 것 같은데..." "그 사람 세금 제대로 내나 한 번 확인해볼까?"

의심의 눈초리가 일상이 된다. 관계가 거래가 된다. 인사가 사업이 된다.

커피숍에서 아메리카노를 시키면서도 생각할 것이다. '이 사장이 매출을 다 신고할까?' 택시를 타면서도 의심할 것이다. '이 기사가 카드 단말기를 일부러 고장냈나?'


판사 없는 재판정


판사들이 왜 높은 곳에 앉아 있는지 생각해본 적이 있나. 그들이 거들먹거리라고 있는 게 아니다. 법정에서만큼은 돈도 권력도 인기도 통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헌법 제103조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고 명시한다. 이 조항이 존재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재판은 감정이 아닌 법으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시민들이 직접 재판관이 되라고 한다. 5억원이라는 판사료를 받고. 동네 아줌마가 건물주의 탈세를 의심하고, 편의점 알바생이 사장의 부정을 감시하고, 아파트 주민이 관리사무소의 비리를 추적한다.

몽테스키외가 보면 기절할 삼권분립의 붕괴다.


북한식 5호 담당제의 자본주의 버전


북한에는 '5호 담당제'라는 것이 있다. 5가구마다 1명의 담당 선전원을 배치해 가정생활 전체를 당이 지도한다는 명목으로 감시하는 제도다.

그런데 우리가 만들려는 건 뭔가. '5억원 담당제'다. 돈으로 국민을 매수해서 국민끼리 감시하게 하는 시스템. 북한보다 더 정교하다. 북한은 강제로 했지만, 우리는 자발적으로 할 테니까.

중국의 사회신용시스템도 있다. 모든 개인의 행동을 점수로 매기고 관리하는 시스템. 하지만 그들도 5억원씩 주지는 않았다. 우리가 더 창의적이다.


신뢰의 시세


내가 무서워하는 건 돈이 아니다. 신뢰의 죽음이다.

신뢰에도 시세가 있다면 지금 폭락 중이다. 정치인들 때문에. 언론 때문에. 기업들 때문에. 그런데 여기서 국민들까지 서로를 의심하기 시작하면 신뢰의 시세는 바닥을 뚫는다.

커피숍에서 친구와 나누는 대화도 조심스러워질 것이다. "야, 요즘 현금 거래 많이 하냐?"라는 농담도 위험해진다. 그 농담이 5억원짜리 제보가 될 수 있으니까.

아파트 복도에서 이웃과 마주쳐도 눈치를 봐야 할 것이다. 그 사람이 나를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으니까. 인사인지 정찰인지.


파놉티콘의 완성


미셸 푸코가 말한 파놉티콘을 아는가. 중앙에 감시탑이 있고 주변에 감옥이 배치된 구조다. 감시당하는 사람은 자신이 언제 감시받는지 모른다. 그래서 항상 감시받는다고 생각하고 행동한다.

이재명의 제안은 파놉티콘의 완벽한 현대적 구현이다. 모든 국민이 감시탑이 되고, 동시에 감옥이 된다. 5억원이라는 인센티브와 함께.


민주주의는 비매품


민주주의는 신뢰 위에 세워진다. 서로를 의심하지 않는다는 최소한의 약속. 그 약속이 깨지는 순간 모든 게 무너진다.

"범죄 척결"이라는 명분은 그럴듯하다. 누가 범죄를 옹호하겠는가. 하지만 명분이 수단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범죄를 잡겠다고 민주주의를 팔 수는 없다.

5억원으로 살 수 있는 건 고발자들의 충성심뿐이다. 민주주의는 돈으로 살 수 없다. 한 번 팔리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역사가 증명한다.


거부의 용기


나는 5억원을 포기한다. 그 대신 옆집 아저씨가 여전히 웃으며 인사해주는 세상을 택한다. 의심 대신 인사를, 감시 대신 신뢰를. 그게 더 비싸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만큼. 하지만 그게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이다. 5억원보다 비싼 것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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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 1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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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lsquf242025-06-01 11:22:22

    개딸들이 넘넘넘 원망스럽다.
    나라의 안위, 국민 생활 따위는 모르거나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공안통치를 향해 거침없이 질주하는 현실에 청맹과니 노릇을 한다
    홍위병, 서북청년단 깃발을 들고 설쳐댈 것이 불보듯 환하다
    속이 터져나간다

아페리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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