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느리다. 당연하다. 사유재산권을 보장해야 하고, 거주이전의 자유를 존중해야 하고, 종교의 자유를 지켜야 한다. 소수의 목소리에도 귀 기울여야 하고, 반대 의견도 수렴해야 한다. 토론하고, 협의하고, 합의를 도출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지난하다. 때로는 답답하다.
그런데 누군가 이 모든 과정을 생략하고 단숨에 밀어붙인다면? '다수의 뜻'이라는 이름으로, '공공의 이익'이라는 명분으로 말이다. 사람들은 박수를 보낸다. "역시 일을 잘한다"고.
히틀러도 그랬다. 폴포트도, 모택동도, 푸틴도 마찬가지였다. 의견수렴 과정을 생략한 밀어붙이기가 '과감하게 일처리 잘하는 것'으로 미화됐다. 그리고 우리는 2020년 한국에서 똑같은 장면을 목격했다.
2020년 12월, 사립 경기대학교 기숙사에서 시험 공부를 하던 학생이 뉴스를 켰다.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경기대 기숙사를 코로나19 생활치료센터로 전용한다고 발표했습니다."
학생은 스마트폰을 다시 들여다봤다. 자신이 살고 있는 그 기숙사 이야기였다. 사전 협의는 없었다. 통보만 있었을 뿐이다. 4일. 짐을 싸서 나가야 하는 시간이었다. 방학 중 머물 곳이 없던 친구들도, 아직 끝나지 않은 학기를 보내야 하는 자신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재명은 기자회견에서 말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이해해 줄 것이라고 믿는다."
부탁이 아니었다. 협의 제안도 아니었다. 이해가 아니라 복종을 전제한 확신이었다. 그리고 그 확신 뒤에는 '다수'가 있었다. 코로나를 막아야 한다는 다수의 목소리가.
한 겨울에 쫒겨난 학생들의 대책마련 요구는 이미 '지잡'대 '이기주의자'들의 땡강으로 댓글에서 조롱당했다. 학생은 가방을 쌌다. 갈 곳이 있는지는 나중 문제였다. 이미 결정된 일이었으니까.
파시즘은 항상 '다수'를 앞세운다. 그리고 그 다수의 뜻에 반하는 것은 모두 '이기주의'나 '반사회적 행위'로 규정한다. 민주주의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 먼저 대학 측과 협의했을 것이다. 학생들에게 사전 설명을 했을 것이다. 대안 숙소를 마련하고, 이주 비용을 지원하고, 충분한 시간을 줬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반대 의견이 나왔다면 토론을 통해 해결책을 찾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과정은 '비효율적'이다. 시간이 오래 걸린다. 반대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수도 있다.
이재명은 다른 방법을 택했다. 일방적으로 발표하고, 법적 권한을 동원해 밀어붙이고, 반대하는 이들을 '이기적'이라고 몰아갔다. 그리고 다수는 박수를 보냈다.
1933년 독일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1933년, 독일 국민들은 히틀러를 열광적으로 지지했다. 그는 '일을 잘하는' 지도자였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인들은 끝없이 토론만 했다. 경제는 파탄 났고, 실업률은 치솟고, 독일은 굴욕적인 베르사유 조약에 묶여 있었다. 그런데 히틀러는 달랐다. 결단력이 있었다. 복잡한 정치적 협상 없이 원하는 것을 즉시 실행했다.
경제를 살렸고, 실업률을 낮췄고, 독일을 다시 강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해냈다'.
독일 국민들은 박수를 보냈다. "총통은 합니다"라고 외쳤을지도 모른다.
유대인들의 권리는 차츰 박탈됐다. 처음엔 공무원직에서 배제되고, 이어 상점 출입이 금지되고, 결국 게토로 몰렸다. 하지만 다수는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들에게는 해당 없는 일이었으니까. 오히려 '독일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히틀러는 계속 일을 잘했다. '다수의 뜻'을 실현하는 데 그만한 지도자가 없었다.
2020년 초 새벽, 신천지 본부에 경찰차들이 몰려들었다. 두 개 중대 규모였다.
이재명이 전국 신천지 신도 42,000여 명의 명단을 확보하라고 지시한 결과였다. 이미 해당 집회 참석자 1,290명의 명단은 제출된 상황이었다. 문재인 정부 보건복지부도 철수를 요청했다.
하지만 이재명은 듣지 않았다. 감염병예방법을 방패 삼아 강제 진입을 감행했다. 서버에서 모든 신도의 개인정보를 추출했다. 막으면 체포하겠다고 엄포를 놨다.
결과는 어땠을까? 신규 확진자는 0명이었다. 이미 등록된 확진자 3명만 재확인됐을 뿐이다.
그런데도 박수가 터져 나왔다. 신천지라는 '밉상'을 제압한 이재명에게 환호가 쏟아졌다. 종교의 자유, 개인정보 보호, 기본권 침해 같은 말들은 '국가 위기 상황'이라는 명분 앞에서 힘을 잃었다.
폴포트도 이런 식이었다. 캄보디아를 '순수한 농업국가'로 만들겠다는 대의명분 아래 도시 주민들을 농촌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종교를 금지하고, 지식인들을 숙청했다. '새로운 캄보디아를 위한 일'이었다. 다수가 지지했다.
어느 공무원의 월요일
상상해보자. 월요일 아침, 출근길 라디오를 켜던 어느 공무원의 이야기를.
"경기도 공공기관 이전이 확정됐습니다."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차 안을 채웠다. 그는 핸들을 더 꽉 잡았다. 자신이 다니는 기관도 포함돼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몰랐던 일이었다. 아이들 학교는 어떻게 하지? 집은 팔아야 하나? 부모님 병원은?
이재명은 말했다. "직원들은 불편하더라도 해당 지역으로 거주지를 옮겨 삶의 토대를 만들어 주면 좋겠다." 당사자들의 동의는 부차적이었다. 지역 균형 발전이라는 대의만 있으면 개인의 삶은 재배치 가능한 자원에 불과했다. 뉴스 댓글에는 박수가 쏟아졌다. "역시 이재명", "지역 균형 발전", "일 잘한다". 그의 고민은 '지역 이기주의'로 치부됐다.
그제야 알았다. 자신이 소수가 됐다는 것을.
모택동의 대약진운동도 이랬다. '영국을 15년 내에 추월하겠다'는 장대한 목표 아래 농민들을 인민공사로 몰아넣었다. 개인의 사유재산은 몰수됐고, 가족은 해체됐다. '새로운 중국을 위한 일'이었다. 반대하는 자는 '반혁명분자'였다.
2022년 2월 24일, 푸틴이 우크라이나 침공을 명령했다. '특별군사작전'이라고 불렀다.
의회 토론은 없었다. 국민 투표도 없었다. 푸틴의 일방적 결정이었다. 하지만 러시아 국민 대다수는 지지했다. '서방의 위협으로부터 러시아를 지키는 일'이라고 믿었다. 반전 시위를 벌인 시민들은 체포됐다. 독립 언론들은 폐쇄됐다. '국가를 위한 일'에 반대하는 것은 반역이었다.
푸틴도 '일을 잘하는' 지도자였다. 복잡한 국제정치적 협상 없이, 서방과의 지루한 외교적 대화 없이, 원하는 것을 즉시 실행했다. 효율적이었다. 우크라이나 민간인들이 죽어가는 것은 '부수적 피해'였다. 수만 명의 러시아 청년들이 전사하는 것도 '조국을 위한 희생'이었다.
히틀러, 폴포트, 모택동, 푸틴. 그리고 이재명.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의견수렴 과정을 생략한 밀어붙이기다. 복잡한 민주적 절차를 '비효율'로 치부하고, '다수의 뜻'이라는 이름으로 소수를 짓밟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반드시 등장하는 것이 '대의명분'이다. 국가 발전, 공공의 이익, 혁명의 완성, 조국 수호. 누가 감히 반대할 수 없는 숭고한 목표들이다.
하지만 그 숭고함 뒤에 숨은 것은 권력자 개인의 의지다. 그리고 그 의지에 열광하는 군중들의 박수다.
민주주의의 복잡하고 지루한 절차들은 바로 이런 순간을 막기 위해 존재한다. 사유재산권, 거주이전의 자유, 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 이 모든 권리들은 '다수의 폭정'으로부터 개인을 보호하기 위한 방패다.
지금은 반발로 빠졌지만 서울 여의도에 있는 민간 해운회사 HMM 본사를 부산으로 이전하겠다는 공약.
민간기업이었다. 그런데 자기가 옮기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직원들이 동의했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HMM측은 당황했다. 그런 협의를 한 적이 없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이미 공약은 발표된 후였다. 이재명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부산 지역민들의 표가 더 중요했으니까. 하루 아침에 부산으로 이사를 가야 할지도 모르는 HMM 직원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아이들 학교는? 배우자 직장은? 부모님 돌봄은?
하지만 '지역 균형 발전'이라는 대의명분 앞에서 이런 걱정들은 '이기적인 것'이 됐다.
스탈린의 집단농장화도 이런 식이었다. 개인 농장을 몰수해 집단농장으로 통합하겠다는 정책을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농민들의 동의는 필요 없었다.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대의가 있었으니까. 반대하는 농민들은 쿨라크로 분류돼 시베리아로 추방됐다.
우리는 모두 언제든 소수자가 될 수 있다.
오늘 이재명의 코로나 대책에 박수를 보낸 시민도, 내일은 자신의 아파트가 '공공재개발'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오늘 신천지 기습을 지지한 사람도, 내일은 자신이 다니는 교회가 '사회 문제'로 지목될 수 있다. 오늘 공공기관 이전에 찬성한 지역민도, 내일은 자신의 직장이 '효율성'을 이유로 사라질 수 있다. 그때 깨닫게 된다. 아무리 하소연해도 소수의 목소리에는 귀 기울이는 이가 없다는 것을. 오히려 다수는 '또 일을 잘했다'며 피해자를 짓밟는다는 것을.
1930년대 독일에서 유대인들이 느꼈던 감정이 바로 이런 것이었을 것이다. 어제까지 이웃이던 사람들이 갑자기 등을 돌리고, 자신들의 고통을 '독일 발전'의 당연한 대가로 여기는 순간의 서늘함.
캄보디아에서 도시민들이 농촌으로 강제 이주당할 때도, 중국에서 농민들이 인민공사로 몰려들 때도, 러시아에서 반전 시위자들이 체포될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재명은 합니다"라는 슬로건이 품고 있는 위험은 바로 여기에 있다.
무엇을 하는가보다 한다는 것 자체가 미덕이 되는 순간, 민주주의의 핵심인 숙의와 합의는 비효율의 상징으로 전락한다. 토론은 '시간 낭비'가 되고, 반대 의견은 '발목 잡기'가 된다.
그리고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권력자의 의지와 다수의 함성이다. "해라!" "옳다!" "일 잘한다!"
히틀러도 합니다. 폴포트도 합니다. 모택동도 합니다. 푸틴도 합니다.
그들은 모두 뭔가를 '했다'. 문제는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그 과정에서 누가 희생됐는지였다.
파시즘은 하루아침에 오지 않는다. 탱크와 군복을 입고 나타나지도 않는다. 대신 '효율성'과 '추진력'이라는 가면을 쓰고 온다. '일 잘하는 지도자'라는 찬사를 받으며 나타난다. 그리고 항상 '다수'를 앞세운다. 다수의 뜻, 공공의 이익, 국가의 발전. 누가 감히 쉽사리 나서 반대할 수 없는 명분들이다.
하지만 그 명분 뒤에 숨은 것은 개인의 권리를 짓밟는 폭력이다. 사유재산권, 거주이전의 자유, 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 이 모든 것들이 '비효율'이라는 이름으로 무시당한다. 이재명이 보여준 것은 바로 이런 파시즘의 전형적인 작동 방식이다. 복잡한 민주적 절차를 생략하고,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반대하는 이들을 '이기적'이라고 몰아가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다수는 박수를 보낸다. "역시 일을 잘한다"고.
2020년 12월 어느 저녁, 경기대 기숙사에서 짐을 싸던 학생이 창밖을 내다봤다. 며칠 후면 이곳은 코로나 확진자들로 채워질 예정이었다. 학생은 가방 지퍼를 올렸다. 갈 곳은 있을까? 그건 자신의 문제였다. 이재명은 이미 다음 일을 준비하고 있을 테니까.
이 학생이 바로 당신일 수 있다. 갑작스러운 통보를 받고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는 사람이.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소수의 목소리가.
"이재명은 합니다"라는 슬로건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물어야 한다. 무엇을 하는가? 어떻게 하는가?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누구를 희생시키면서 하는가?
답이 명확해질 때, 비로소 우리는 파시즘의 진짜 얼굴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얼굴이 얼마나 친숙하고, 얼마나 무서운지도.
파시즘은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다. '일 잘하는 지도자'라는 가면을 쓰고.
이 기사에 7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훌륭한 내용입니다.
감사합니다.
훌륭한 내용입니다.
감사합니다.
그 "잘한다는 일"조차도 빈깡통 혹은 특정업체 배불리기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사람들이 이제야 조금씩 알아가고 있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성과여부를 따지기 이전에 이렇게 일방향적이고 강압적인 방식에 대해 문제제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악은천사의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
가면속 악마의 얼굴을 보아아 한다
제발 많은 사람들이 읽고 그 심각성을 깨우치고 투표로서 보여주길 바랄뿐입니다
좋은글 진심으로 공감합니다
하...무섭네요.
독재국가 막아 줄 이낙연 김문수
두 분의 제 7공화국이 막아주길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