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거북이가 폭탄을 터뜨린 날
  • 박주현 칼럼리스트
  • 등록 2025-05-25 22:16:26
  • 수정 2025-05-25 22:46:30
기사수정
  • 그가 대선후보임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 호텔경제론이 현실에서 만난 참혹한 결말.
  • 대권의 자격이 없음을 스스로 고백한 날.


그날, 이재명이 거북이 인형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을 때 나는 이상한 기시감을 느꼈다. 마치 영화에서 주인공이 자신도 모르게 지뢰밭을 걸어가는 장면 같았다. 발걸음은 가벼웠지만, 관객들 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시흥 유세장. 5월의 햇살 아래 그는 환하게 웃으며 자신의 '치적'을 자랑했다. 거북섬 웨이브파크. "이재명의 경기도가 그렇게 신속하게 큰 기업 하나를 유치했다"라고. 그 순간 나는 뭔가 싸한 느낌에 빠져들었다.


몇 시간 뒤 숫자가 공개됐다. 공실률 87%.


이 숫자를 세상에 알린 건 야당도, 언론도 아니었다. 바로 그 자신이었다. 아무도 묻지 않은 질문에 스스로 답을 제공한 셈이다. 이것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정치적 자살? 전략적 무지? 아니면 그냥 순진함? 


생각해 보니 패턴이 있었다. "커피 원가 120원" 발언에 이어 또 한 번의 자폭. 현실과 상상 사이 어딘가에서 부유하는 감각. 이준석이 정확히 짚었다. "시흥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다면 현장의 실상부터 파악했어야 했다." 하지만 과연 관심이 있었을까? 


한편 지구 반대편에서는 트럼프가 웃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에게 협상은 정교한 체스 게임이다. 상대방이 불안해할 때까지 기다린다. 심지어 자국에서 생산하는 F-35 전투기 협상에서조차 "우리는 사지 않을 수도 있다"라고 반복하며 상대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었다. 그는 절대 서두르지 않는다. 몇 수 앞을 내다보며 움직인다.


같은 거북이를 모티브로 신화적인 역사를 만드신 이순신 장군이 이 장면을 보셨다면 "그가 대선후보임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하셨을지도 모르겠다. 적에게 스스로 약점을 알려주는 전략이라니, 임진왜란 때도 본 적 없는 신박한 전술이었을 테니까.


하물며 트럼프는 고사하고 다른 외국 정상들이 이 사건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조금만 분위기가 상승돼도 아무도 공격하지 않은 약점을 스스로 노출시키는 행위. 마치 체스에서 자신의 킹을 상대방 앞으로 밀어내는 것과 같다. 예측 불가능한 자폭 성향. 국제 협상에서는 치명적이다.


거북섬은 이제 상징이 되었다. 호텔경제론의 현실 실험장. "10만 원을 퍼주면 100만 원 효과가 난다"던 그 화려한 이론의 결과물. 텅 빈 건물들과 87%의 공실률이 답이었다. 숫자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정치에서 메시지 컨트롤은 산소와 같다. 자신에게 불리한 정보는 감추고, 유리한 정보만 선별적으로 노출시켜야 한다. 이건 정치의 기본 문법이다. 그런데 거북섬 사건은 그 정반대를 보여준다. 적이 찾지도 못한 폭탄을 스스로 그들 손에 쥐어준 격이다. 


민주당이 뒤늦게 고발하겠다고 맞대응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87%라는 숫자는 사람들 머릿속에 못처럼 박혔다. 거북섬의 빈 사무실들처럼 말이다.


상상해보라. 미래의 어느 협상 테이블. 한쪽에는 트럼프 같은 노련한 협상가가 앉아 있고, 맞은편에는 거북이 인형을 든 채 자신의 실패작을 자랑하는 사람이 있다. 그 순간 신뢰성과 예측 가능성, 국제 협상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가 사라진다.


정치는 국내에서만 이뤄지는 게임이 아니다. 국제 협상은 더욱 냉혹하다. 상대방은 당신의 모든 실수를 기억하고, 그것을 언젠가 무기로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다.


거북이는 느리지만 신중하다고 했다. 그런데 그날 시흥 유세장의 거북이는 달랐다. 너무 빨랐고, 너무 경솔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너무 멍청했다.


87%의 공실률. 이 숫자가 말하는 건 단순한 정책 실패가 아니다. 현실을 보는 눈의 부재,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의 한계, 그리고 자신을 객관화하지 못하는 치명적 맹점을 보여준다.


거북이 인형은 지금 어디 있을까? 누군가의 책상 위에서 여전히 느긋하게 미소 짓고 있을 것이다. 그 어이없게 꾸며진 쿠션 거북이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느림의 미덕일까, 아니면 현실 감각의 실종일까?


답은 거북섬의 텅 빈 건물들이 알고 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들리는 그 공허한 울림 속에.


관련기사
TAG
8

이 기사에 3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 프로필이미지
    won6er2025-05-26 01:17:05

    트럼프를 뽑은 미국 사람들을 비웃던 그때와 다름 없이 트럼프를 뽑은 사람들을 비웃는 사람들이 있어요
    우리 대선 후보 수준을 좀 보라고 얘기해주고 싶네요

  • 프로필이미지
    guest2025-05-25 23:30:42

    앞으로 다른 지역들도 거북섬처럼 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만 했었는데 진짜 외교적인 부분 생각했을 때도 앞이 캄캄해지네요

  • 프로필이미지
    guest2025-05-25 23:22:25

    깊이 있는 분석으로 많이 배웁니다 외교.. 문제가 심각하네요

아페리레
웰컴퓨터
아페리레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