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은 60살이 넘어 뇌가 썩은 게 아니라는 이야기를 했었다.
25살 유시민은 민간인 집단 폭행 치사 사건의 책임을 학생회장 이정우에게 떠넘겼다.
학생회장에게 책임이 있지 자신에겐 아무 책임이 없다는 것이 항소이유서의 진짜 내용이다.
항소이유서는 너무나 명문이라며 당시 법조인들이 돌려가며 읽었다는 식으로 미화되었다.
유시민 나이 21살에는 그 유명한 90쪽의 진술서를 썼다.
유시민 스스로가 그 진술서를 문필 인생의 시작이라 선언했으니, 그 어떤 책보다 유시민에게 의미가 있겠다.
엄혹한 시기 밀고가 그렇게 큰 문제인가?
고문 앞에 나약한 인간은 결국은 불게 된다.
아. 고문을 당하기도 전에 불었다고?

유시민의 90쪽 진술서의 실체는 스스로 방송에서 나와 자랑하다 드러나게 되었다.
KBS 대화의 희열에서, "뜻밖의 글쓰기 재능을 발견한 곳이 합수부"라고 떠벌리다 심재철의 격분을 사게 되었다.
"21살 청년의 자필 진술서가 다른 민주화 인사 77명의 목을 겨누는 칼이 되었다"
그러나 유시민의 뇌는 자기합리화를 다 마친 이후였나 보다.
"저는 그 진술서를 보면 잘 썼다고 생각한다. 감출 것은 다 감췄고 부인할 것은 다 부인했다"
30년간 배신자로 찍힌 심재철과 양심의 가책을 훌훌 털어버린 유시민의 논쟁은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심재철은 결국 전문을 공개했다. 심재철이 쓴 13쪽의 진술서와 유시민 쓴 90쪽 전문은 지금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보통은 2~5쪽 쓰는 진술서가 왜 이렇게 길어졌을까.
유시민의 진술서 전문 링크
유시민은 구차한 변명을 이어갔다.
"수사관을 속이기 위해 그럴듯하게 창작해서 적은 것이다. 또 심 의원 등 이미 사정 당국에 노출된 사람들만 적극적으로 내세운 것일 뿐, 비밀조직을 공개했다거나, 경찰에 적극 협조했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아니다.
심재철의 일거수일투족을 다룬 조사보고서다.
진술서 수준이 아니라 흥신소 미행 보고서다.
심재철이 몇 시에 어디서 무슨 말을 했는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유시민의 보고는 심재철 공소장에 반영되어 심재철을 옭아매었다.
유시민의 말과 달리 비밀조직도 공개되었고, 노출되지 않은 사람도 등장한다.
분개할 만한 구절도 종종 보인다.
"회의가 끝난 후 저는 총학생회장 심재철과 함께 원풍아파트의 그의 누님댁으로 가서 성명서 초안을 작성하였는데"
왜 굳이 심재철의 누님까지 언급할까?
내가 심재철이라면 피가 거꾸로 솟았을 것이다.
유시민은 구차한 변명을 이어갔다.
"이해찬 선배가 몇 천명 보는 데서 내 멱살을 잡은 적이 있기 때문에 그것까지 진술하지 않기는 어려웠다"
싸웠다고 치자. 어떻게 화해했는지까지 구체적으로 진술할 필요가 있을까?
"이해찬이 저에게 콜라를 주었으므로 제가 4월11일 일도 있고 해서 화해하느라 먼저 인사를 청하고 악수를 했는데 그때서야 저는 바로 그가 이해찬이라는 것을 알았으며 제가 "일전에 다툰 일은 미안합니다"고 사과하자 이해찬은 일을 하다보면 그럴수도 있는 일이라면서 수고가 많다고 격려해주었습니다."
이해찬과의 우정의 시작을 상세하게 기록해, 브로크백 마운틴 아니 관악 마운틴을 촬영할 수 있을 지경이다.
이해찬이 이 진술의 존재를 알았다면 운동권 주류 파벌에 유시민을 끼워줬을까?
유시민의 진술서는 일반적이지 않다.
주모자로 몰린 심재철도 13쪽의 진술서를 쓰고 배신자로 몰렸는데, 왜 90쪽이나 쓰게 되었을까?
진술이 길면 앞뒤 모순이 생긴다.
다른 학생들도 잔뜩 잡혀와 상호검증이 되니 '창작'했다면 재차 삼차 잡혀 와 진술하게 되었을 것이다.
진술 내용을 살펴보면, 유시민이 전두환 정권의 프락치가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까지 품게 될 정도로 상세한 진술이다.
이 진술 내용에 있는 유시민의 행동도 의문이다.
"저는 성대가 약해 영등포까지 오는동안 목이 다 쉬어버렸으므로 학생들을 지휘할 생각을 포기하고 학생들 틈에 섞여있었고"
"강경론과 온건론이 대립하여 서로 양보할 기미가 없었으므로 저는 중립을 지켰습니다."
"같이 모여 병영집체 훈련거부 계획을 수립하고 있을 때 저는 운영위원이 아니므로 총학생회장 심재철의 말에 따라 한쪽 구석에서 하늘색 볼펜으로 "존경하는 학부모님께"라는 제목의 가정통신문을 초안하였읍니다."
수동적으로 끌려다니며 중립을 지키고 있다.
남들은 고발하면서 자신은 방어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 심재철은 고민한다.
"우리도 괜히 이 문제를 꺼낸 것이 아니냐? 우리가 정부에 말려드는 것 같다."
이런 말까지 보고될 줄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유시민의 진술은 공안당국에 받아들여졌다.
"유 이사장의 진술서엔 당시 운동권 내 여러 단체명과 모임명은 물론, 학생 운동 관련 인사 77명의 이름이 실명 그대로 적혀있다.
심 의원은 “유 이사장의 진술로 인해 행적이 소상히 밝혀진 77명 학우 가운데, 당시 미체포 상태였던 18명은 그의 진술 직후인 6월 17일 지명수배됐다”고 주장했다.
결국 유시민은 이 논쟁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형제처럼 지냈던 심 의원에게 법적 대응은 할 생각도 없고, 논쟁을 계속 이어갈 생각도 없다"
유시민이 진술서를 쓴 7일 뒤, 심재철은 체포되어 고문받았고 5년형을 선고받았다.
(형을 면제받고 강제 징집된다)
그리고 배신자 낙인이 찍혀 평생을 모욕 당했다.
유시민의 삶은 영화로 만들어 볼 만한다.
제목은 그의 삶을 관통하는 말 "프락치"로 하면 좋겠다.
유시민이 프락치라는 것은 아니니 오해하지 말자.
김성민 칼럼니스트